오래된 책을 비닐봉투에 넣어두면 정말 안전할까?
오래된 책을 오래 보관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기 쉬운 방법이 있다.
비닐봉투다.
먼지도 막을 수 있고, 물이 튀어도 바로 젖지 않을 것 같다. 벌레가 들어가는 것도 막아줄 것 같으니 책 한 권씩 비닐에 넣어두면 꽤 안전해 보인다.
실제로 오래된 책을 중고로 구입하면 투명 비닐에 곱게 싸여 오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책을 비닐 안에 오래 가둬두어도 괜찮을까?

문제는 비닐보다 그 안의 공기다
비닐에 책을 넣으면 바깥 환경과 어느 정도 분리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안전해 보인다.
하지만 책이 들어갈 당시 주변 공기가 습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책 자체도 주변의 수분을 머금고 있을 수 있다.
종이와 가죽, 천 같은 책의 재료는 공기 중 수분에 반응한다. 이런 재료를 **흡습성 재료(Hygroscopic material)**라고 한다.
습도가 높으면 수분을 받아들이고, 건조하면 다시 내놓는다.
그런 책을 습한 상태에서 밀폐하면 안쪽에 작은 환경이 하나 만들어진다.
방 전체는 환기가 되더라도 비닐 안의 공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보존 분야에서는 이런 작은 독립 환경을 **미세환경(Microclimat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그 미세환경이 지나치게 습해졌을 때다.
곰팡이가 좋아하는 조건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 의회도서관도 습도가 높은 장소에서 책을 플라스틱 용기나 봉투에 넣어 보관하면 곰팡이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결국 비닐이 곰팡이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습기를 품은 책과 공기를 그대로 가둬두는 상황이 문제다.
장마철이라면 더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한여름 장마철을 떠올려보자.
며칠 동안 비가 계속 내리고 방 안 공기도 눅눅하다.
이때 책을 비닐에 넣는다.
그리고 계절이 바뀌면서 주변 온도가 달라진다.
밀폐된 공간과 바깥 환경 사이에 온도 차이가 생기면 조건에 따라 내부에서 수분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비닐에 싸놓은 순간 안심하기 쉽다는 것이다.
책 표면이 보이지 않으니 작은 변화도 늦게 발견한다.
퀴퀴한 냄새가 생겨도 바로 알아차리기 어렵고, 책 아래쪽이나 책등 주변에서 곰팡이가 시작돼도 비닐을 열어보기 전에는 모르고 지나갈 수 있다.
그래서 오래된 책을 보존할 때는 단순히 외부와 차단하는 것보다 책 주변의 환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그렇다면 플라스틱은 고서 보관에 쓰면 안 될까?
여기서 한 가지 오해는 피해야 한다.
플라스틱 자체가 보존에 나쁜 재료라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박물관과 기록보존 분야에서도 여러 종류의 플라스틱이 사용된다.
미 의회도서관은 첨가물이 없는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폴리에스터(PET) 등을 비교적 안정적인 플라스틱 재료로 설명한다.
반대로 **PVC(폴리염화비닐)**나 성분을 알 수 없는 플라스틱은 보존용 재료로 피하는 것이 좋다.
여기서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마트에서 받는 비닐봉투와 보존기관에서 사용하는 투명 보존재료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할 수 있다.
하지만 보존에서는 단순히 ‘투명한 비닐인가’를 보는 것이 아니다.
무슨 재질인지, 첨가제가 있는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지를 함께 본다.
그래서 오래된 책을 보관할 때 “비닐이면 안 된다”라고 외우는 것 역시 정확한 답은 아니다.
비닐 상자가 습한 지하실을 안전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책을 오래 보관할 공간으로 지하실이나 창고를 선택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플라스틱 상자에 넣어두면 괜찮겠지.”
겉보기에는 꽤 든든하다.
물이 조금 튀어도 바로 닿지 않고 먼지도 막아준다.
실제로 폴리에틸렌이나 폴리프로필렌 상자는 물에 대한 2차적인 보호수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상자가 습한 지하실 자체를 좋은 보존환경으로 바꿔주는 것은 아니다.
미 의회도서관은 지하실·다락방·차고처럼 온도와 습도 변화가 크고 누수 위험이 높은 장소는 중요한 자료의 보관 장소로 적합하지 않다고 안내한다.
플라스틱 상자 안에 넣어도 더위와 추위, 높은 습도 같은 환경조건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좋지 않은 공간을 좋은 상자 하나로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래된 책은 무엇에 넣어야 할까?
여기서 생각보다 평범한 답이 나온다.
책의 상태가 괜찮다면 무조건 무언가에 밀폐할 필요는 없다.
깨끗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실내에서 적절하게 책장에 보관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예방적 보존이 될 수 있다.
반대로 표지가 떨어지거나 책등이 약해진 귀중한 책이라면 책의 크기에 맞는 **보존용 상자(Protective enclosure)**가 도움이 될 수 있다.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는 적절한 보존용 상자가 빛과 먼지, 취급 중 발생하는 물리적 손상으로부터 책을 보호하고, 떨어져 나온 제본 조각도 함께 보관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종이와 판지로 만든 보존용 수납재라면 산과 리그닌이 적은 적절한 재료인지 확인하는 것도 중요하다.
여기에서도 ‘상자’라는 이름보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가 더 중요하다.
시중에서 ‘아카이벌’이라는 단어가 붙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보존에 적합한 제품이 되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비닐봉투가 꼭 필요한 순간도 있다
조금 의외지만 보존 현장에서도 책을 비닐봉투에 넣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곤충이 의심되는 자료를 다른 책과 분리해 관찰하거나, 재난 상황에서 젖은 자료를 냉동처리하기 위해 임시 포장하는 경우다.
곰팡이가 묻은 자료를 격리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특정 조건 아래 플라스틱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책장에서 수십 년 동안 책을 보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목적이 분명하고,
기간이 정해져 있으며,
그다음 처리방법까지 생각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기관에서 비닐을 사용한다는 사실만 보고 “그럼 고서도 밀봉하면 되겠네”라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보존에서는 재료보다 사용방법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결국 비닐보다 먼저 봐야 할 것이 있다
오래된 책을 발견하면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부터 든다.
먼지가 묻지 않게 싸고,
물이 닿지 않게 밀봉하고,
외부 공기와도 차단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책은 만들어진 뒤에도 주변 환경과 계속 수분을 주고받는 재료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무조건 꽁꽁 싸는 것이 답은 아니다.
비닐봉투를 사용할지 고민하기 전에 먼저 살펴볼 것이 있다.
책이 지금 건조한가.
보관하는 공간은 습하지 않은가.
온도와 습도의 변화가 심하지 않은가.
책에 이미 곰팡이나 충해 흔적은 없는가.
장기간 밀폐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이 질문들이 먼저다.
고서를 보호한다는 것은 바깥세상과 완전히 차단하는 일이 아니라, 책이 안정적으로 머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에 더 가깝다.
그래서 다음에 오래된 책을 비닐에 넣으려다가도 한 번쯤 손이 멈출 수 있다.
비닐이 좋은가 나쁜가를 생각하기 전에,
지금 이 책이 어떤 환경에 놓이게 되는지를 먼저 보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보관환경에서 다시 책 자체로 돌아간다.
찢어진 종이를 보면 누구나 무언가를 덧대고 싶어진다.
그런데 고서 보존에서는 아무 종이나 잘라 붙이지 않는다.
얇고 비쳐 보이는 일본 종이와 한지 같은 보수용 종이가 등장하고, 접착제 역시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풀과는 조금 다른 기준으로 선택한다.
찢어진 고서에는 왜 아무 종이나 붙이지 않는지, 다음 글에서 살펴본다.
REFERENCES
Library of Congress
Preserving Your Books — Storing Your Books
Library of Congress
Books — Preservation FAQ
Library of Congress
General Preservation FAQ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
Basic Care of Books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
Making Enclosures for Books and Paper Objects
voucher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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