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 꽂아뒀을 뿐인데 책이 휘는 이유
책장에서 오래된 책 한 권이 유난히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다.
꺼내 보면 표지도 약간 틀어져 있고, 책 속 종이 묶음도 한쪽으로 처져 있다.
물을 먹은 것도 아니다.
떨어뜨린 적도 없다.
그냥 몇 년 동안 책장에 꽂혀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책 한 권도 계속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크고 무거운 책이라면 그 힘을 무시하기 어렵다.
책은 읽을 때만 손상되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꽂혀 있는 동안에도 자세가 좋지 않으면 조금씩 변한다.

책은 서로 기대고 서 있다
보통 책장에 꽂힌 책은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옆 책의 도움을 꽤 많이 받는다.
비슷한 크기의 책들이 반듯하게 세워져 있으면 양쪽 표지가 서로를 지지한다.
그런데 책장에 빈 공간이 많아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권이 조금 기울고, 옆 책도 그 책에 기대고, 몇 권이 연달아 비스듬한 상태가 된다.
처음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책의 무게가 아래쪽 모서리와 제본 구조의 특정 부분에 계속 걸린다.
Northeast Document Conservation Center(NEDCC)는 책을 세워 보관할 때 기울거나 주저앉지 않도록 지지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도서관의 북엔드는 단순히 책이 넘어지는 것을 막는 물건이 아니다.
책이 오랫동안 제대로 서 있도록 만드는 작은 보존도구이기도 하다.
큰 책 옆에 작은 책을 꽂으면 생기는 일
책장 한 칸을 보면 크기가 제각각인 경우가 많다.
작은 문고본 옆에 커다란 화집이 있고, 그 옆에 다시 얇은 책이 꽂혀 있다.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기에는 괜찮아 보인다.
보존의 관점에서는 조금 다르다.
큰 책은 표지 전체가 옆 책의 지지를 받아야 안정적으로 설 수 있다.
그런데 옆에 자기 절반 높이밖에 되지 않는 작은 책이 있다면 큰 책의 윗부분은 아무 지지도 받지 못한다.
그 상태에서 조금만 기울어도 책 전체의 무게가 제본에 부담을 줄 수 있다.

그래서 Library of Congress와 NEDCC 모두 가능하면 비슷한 크기의 책끼리 보관하는 방법을 권한다.
책장을 예쁘게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서로가 서로를 제대로 지지하기 위해서다.
이런 이유를 알고 나면 도서관 서가에서 비슷한 판형의 책들이 모여 있는 모습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너무 헐거워도 문제, 너무 꽉 끼어도 문제
그렇다면 빈틈없이 꽉 채워놓으면 가장 안전할까?
그것도 아니다.
책을 꺼낼 때 두 손가락조차 들어가지 않을 만큼 빽빽하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책을 억지로 잡아당기게 되고, 옆 책과 표지가 마찰하며, 책등 윗부분을 잡고 빼는 습관도 생긴다.
반대로 공간이 지나치게 넓으면 책들이 기울어진다.
결국 적당한 공간을 남기면서 북엔드로 지지하는 것이 좋다.
책이 반듯하게 서 있지만 꺼낼 때 옆 책을 조금 움직일 수 있는 정도다.
보존에서는 이런 사소한 차이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단단히 고정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것도 아니고, 느슨하게 두는 것이 항상 좋은 것도 아니다.
책이 무리 없이 서 있을 수 있을 만큼만 지지하면 된다.
크고 무거운 책은 아예 눕혀 놓기도 한다
큰 화집이나 지도책, 두꺼운 사전 같은 책을 세워놓으면 묘한 모습이 나타날 때가 있다.
표지는 그대로 있는데 안쪽 종이 묶음만 아래로 조금 처져 있는 것이다.
책의 본문을 이루는 종이 덩어리를 **텍스트 블록(Text block)**이라고 한다.
두껍고 무거운 책에서는 이 텍스트 블록 자체의 무게가 상당하다.
책을 세워놓으면 그 무게를 제본 구조가 계속 버텨야 한다.
그래서 매우 크거나 무거운 책은 눕혀서 보관하는 방법이 더 적절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도 책을 열 권씩 높게 쌓아놓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맨 아래 책을 꺼내려면 위의 책을 모두 들어내야 하고, 아래쪽 책은 계속 무게를 받는다.
NEDCC는 평평하게 보관하는 대형 책은 보통 적은 수량으로 낮게 쌓아 취급 부담을 줄이도록 안내한다. :contentReference[oaicite:1]{index=1}
책을 눕히는 목적은 공간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책 자체의 무게를 제본 대신 선반 전체가 받아주도록 하는 것에 가깝다.
책등을 위로 세워놓으면 안 되는 이유
선반 높이가 부족한 커다란 책을 옆으로 세워 끼워놓는 경우도 있다.
이때 방향이 중요하다.
책등이 위로 향하도록 세워놓으면 안쪽의 무거운 텍스트 블록이 아래로 처지면서 표지와의 연결부에 힘을 줄 수 있다.
Library of Congress와 NEDCC 모두 어쩔 수 없이 큰 책을 세로 방향이 아닌 방식으로 보관해야 한다면 책등을 아래쪽으로 두도록 안내한다. :contentReference[oaicite:2]{index=2}
처음에는 별것 아닌 방향 차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년 동안 중력이 작용한다고 생각하면 이유가 보인다.
오래된 책을 보존할 때는 종종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이 재료는 지금 어느 방향으로 힘을 받고 있는가?
오래된 책장이 비뚤어진 이유를 책에서 찾을 수도 있다
책을 오랫동안 세워둔 뒤 생긴 변형을 보면 흔히 책 자체가 낡아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제본 재료의 노화도 영향을 준다.
하지만 보관 자세 역시 무시할 수 없다.
한쪽으로 계속 기울어져 있었는지, 크기가 맞지 않는 책 사이에 끼여 있었는지, 너무 무거운 책을 세워놓았는지, 선반 바깥으로 책 일부가 튀어나와 있었는지도 살펴볼 만하다.
특별한 재난이 없어도 작은 물리적 힘은 매일 작용한다.
하루에는 아무 변화가 없어 보인다.
1년이 지나도 눈치채지 못할 수 있다.
그런데 10년, 20년이 지나면 그 작은 힘이 책의 모양으로 남는다.
그래서 예방적 보존이라는 말이 조금 실감난다.
거창한 복원기술만 보존이 아니다.
책을 반듯하게 세우는 것.
크기가 맞는 책끼리 두는 것.
기울어지지 않게 북엔드를 받치는 것.
크고 무거운 책은 눕혀두는 것.
이런 평범한 행동이 오히려 책을 고칠 일을 줄여준다.
책장 앞에서 할 수 있는 보존은 생각보다 많다.
가장 좋은 복원은 때로 복원이 필요해질 손상을 처음부터 만들지 않는 것이다.
REFERENCES
Library of Congress
Storing Your Books
Library of Congress
Handling Your Books
Northeast Document Conservation Center
Storage and Handling for Books and Artifacts on Paper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
Basic Care of Books
voucher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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