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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가는 왜 가장 잘 붙는 풀을 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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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가 찢어졌다.

붙여야 한다면 당연히 접착력이 강한 풀이 좋은 것처럼 보인다.

한 번 붙이면 떨어지지 않고, 단단하게 고정될수록 수리도 오래갈 것 같다.

그런데 오래된 책과 기록물을 복원하는 현장에서는 조금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순간접착제도 아니고, 강력 접착제도 아니다.

작은 붓 옆에 놓인 것은 마치 묽은 죽처럼 보이는 하얀 풀이다.

**밀전분풀(Wheat starch paste)**이다.

수백 년 된 종이에 사용하는 접착제가 왜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걸까?

오래된 종이 자료 옆에 작은 유리용기에 담긴 밀전분풀과 얇은 보수용 종이, 작은 붓이 놓인 보존 작업대

너무 잘 붙는 것도 문제가 된다

집에서 물건을 고칠 때는 접착력이 강할수록 든든하다.

하지만 고서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종이는 늙는다.

접착제도 늙는다.

그리고 둘은 붙어 있는 동안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처음에는 투명하고 깨끗했던 접착제가 몇십 년 뒤 갈색으로 변할 수도 있다.

딱딱해질 수도 있고, 주변 종이에 얼룩을 남길 수도 있다.

예전에 살펴본 오래된 투명테이프가 대표적인 사례다.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는 시중의 일부 접착제가 시간이 지나면서 화학적으로 불안정해지고, 접촉한 종이에 변색이나 손상을 남길 수 있다고 설명한다.

접착제를 고를 때 현재의 접착력만 볼 수 없는 이유다.

보존가가 궁금해하는 것은 오히려 이런 쪽에 가깝다.

이 풀은 30년 뒤에도 종이를 해치지 않을까?

그리고 질문이 하나 더 붙는다.

나중에 다시 떼어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오늘의 복원도 언젠가는 오래된 수선이 된다

오래된 책을 펼쳐보면 과거 사람들이 했던 수선을 발견할 때가 있다.

종이띠가 붙어 있고, 풀 자국이 남아 있고, 가죽 조각으로 책등을 덧댄 흔적도 있다.

그때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보존가는 그것을 다시 처리해야 할 때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현재의 복원도 결국 같은 운명을 맞는다는 점이다.

50년 뒤에는 오늘 사용한 종이와 접착제도 ‘과거의 수선재’가 된다.

그래서 현대 보존에서는 미래의 사람이 다시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밀전분풀이나 메틸셀룰로오스 같은 접착제가 종이 보존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다.

CCI는 이들 접착제가 필요한 경우 훈련된 보존전문가에 의해 제거될 수 있고, 적절하게 사용했을 때 종이에 얼룩을 남길 위험이 낮은 재료로 설명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제거 가능성이란 언제든 물을 묻히면 깨끗하게 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접착제도 변하고 종이와의 결합도 달라진다.

보존에서 ‘되돌릴 수 있다’는 말은 절대적인 약속이라기보다 미래의 선택지를 가능한 한 남겨두려는 태도에 가깝다.

밀가루 풀과 밀전분풀은 같은 걸까?

이름 때문에 오해하기 쉬운 부분도 있다.

밀전분풀이라고 하면 집에서 밀가루에 물을 섞어 만드는 풀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보존용으로 사용하는 밀전분은 일반적인 밀가루와 같지 않다.

밀가루에는 전분뿐 아니라 단백질과 지방 등 여러 성분이 들어 있다.

보존용 밀전분은 이런 성분을 상당 부분 제거해 전분을 정제한 재료다.

여기에 물을 넣고 가열하면 전분 입자가 물을 흡수하면서 부풀고 점성이 생긴다.

겉모습은 하얀 죽처럼 변한다.

투명한 유리용기에서 정제된 밀전분과 물을 가열해 부드럽고 균일한 보존용 전분풀을 만드는 모습

CCI의 밀전분풀 지침을 보면 생각보다 제조 과정도 세심하다.

전분과 물의 비율을 맞추고,

충분히 가열하고,

덩어리를 제거하고,

사용할 농도에 맞게 다시 조절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히 ‘천연 풀’이라는 이름이 아니다.

일정한 성질의 접착제를 만들어 필요한 양만 사용하는 데 있다.

보존가는 풀의 세기도 바꾼다

더 흥미로운 것은 같은 밀전분풀도 항상 똑같이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찢어진 얇은 종이를 보수할 때와,

책등 안쪽의 종이를 붙일 때,

조금 무거운 재료를 연결할 때 필요한 접착력은 같지 않다.

그래서 전분풀은 물을 더해 묽게 만들기도 한다.

CCI에 따르면 밀전분풀은 상당히 묽게 희석해도 접착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 특성은 종이 보수에서 꽤 유용하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접착제를 넣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오래된 종이에 풀을 많이 바르면 수분도 그만큼 많이 들어간다.

종이가 늘어나거나 물결치듯 변형될 수 있고, 물에 약한 잉크가 있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좋은 접착제라는 것은 단순히 잘 붙는 풀을 뜻하지 않는다.

적은 양으로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는 풀이어야 한다.

같은 밀전분풀도 사용할 수 없는 종이가 있다

여기까지 읽으면 밀전분풀이 고서복원의 만능 접착제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지는 않다.

미 의회도서관이 보존한 한 그림에서는 종이에 물에 녹는 인쇄재료가 존재했다.

그 부분에 물을 기반으로 하는 밀전분풀을 사용하면 기록 자체가 번질 위험이 있었다.

보존가는 그 부분에 다른 방식의 건식 접착재를 사용했다.

또 다른 채색 문서에서는 밀전분풀을 사용하되, 보수용 종이에 바른 풀이 어느 정도 마른 뒤 적용해 종이에 들어가는 수분을 줄였다.

같은 접착제라도 자료의 상태에 따라 사용법이 달라진 것이다.

오래된 채색 문서의 작은 부분에서 잉크의 수분 민감성을 시험한 뒤 보수 방법을 결정하는 보존 조사 모습

이런 사례를 보면 보존재료 목록을 외우는 것만으로 복원을 할 수 없는 이유가 드러난다.

‘종이에는 밀전분풀.’

이렇게 공식처럼 적용할 수 없다.

먼저 종이를 봐야 한다.

잉크가 있는지, 안료가 있는지, 종이가 물을 견디는지, 접착제가 들어갈 위치가 어디인지 확인한 뒤 재료를 고른다.

다시 같은 원칙으로 돌아온다.

재료보다 대상이 먼저다.

메틸셀룰로오스라는 또 다른 풀이 있다

종이 보존자료를 읽다 보면 밀전분풀 옆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메틸셀룰로오스(Methyl cellulose)**다.

셀룰로오스를 변형해 만든 수용성 재료로, 접착제나 점도를 조절하는 재료 등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Library of Congress의 실제 책 복원 사례에서는 오래된 동물성 접착제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한 습포 재료의 매개체로 메틸셀룰로오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또 다른 자료에서는 흰색 수정액처럼 떨어져 나가기 쉬운 재료를 고정하는 데 사용됐다.

같은 보존연구실 안에서도 접착제 하나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떤 것은 종이를 붙이고, 어떤 것은 약한 표면을 안정시키고, 어떤 것은 기존 접착제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다.

접착제도 결국 하나의 도구다.

망치 하나로 모든 작업을 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과거에는 ‘보존용 풀’도 문제를 일으켰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례가 하나 있다.

미 의회도서관에는 과거 정부 인쇄국에서 처리했던 그림들이 있었다.

당시 사용된 수용성 풀이 시간이 지나면서 갈색으로 변하고 뒷면의 보강재를 지나 원본 그림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결국 보존가들은 과거의 보강재와 접착제를 다시 제거해야 했다.

마지막에는 일본 종이와 밀전분풀을 이용해 손상된 부분을 다시 보수했다.

이 사례가 의미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도 누군가는 자료를 보호하기 위해 풀을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결과가 달라졌다.

보존에서 접착제 선택은 오늘의 결과만 보고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장 좋은 풀은 가장 강한 풀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찢어진 오래된 종이가 있다.

가장 강력한 풀로 붙이면 가장 튼튼할 것 같았다.

하지만 보존가가 보는 기준은 달랐다.

종이를 손상시키지 않는가.

시간이 지나도 비교적 안정적인가.

필요 이상의 힘을 만들지 않는가.

수분에 민감한 자료에는 안전한가.

그리고 미래에 다시 처리할 가능성을 남길 수 있는가.

이 조건을 생각하면 접착력이 강하다는 것은 여러 조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래서 보존 작업대 위의 작은 전분풀 그릇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화려한 재료도 아니고, 첨단 화학제품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수백 년 된 종이를 만질 때 필요한 것은 언제나 가장 강한 재료가 아니다.

필요한 만큼 붙잡고,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는 미래의 사람이 다시 선택할 여지를 남기는 재료다.

고서복원에서 좋은 재료는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다.

책이 계속 책으로 남아 있도록 조용히 뒤에서 돕는다.

REFERENCES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
Wheat Starch Paste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
Products Used in Preventive Conservation

Library of Congress
Conservation Corner: Historical Book Repair

Library of Congress
Treatment of Rare and Colorful Marriage Document

Library of Congress
Conservation Treatment of a Rare Early Martin Ramirez Drawing

Library of Congress
Preserving Herb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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