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500년 된 책이 100년 된 책보다 멀쩡할까?
오래된 책을 몇 권 나란히 놓고 보면 가끔 이상한 장면을 만나게 된다.
분명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책인데 종이가 생각보다 멀쩡하다. 누렇게 변하기는 했어도 책장을 넘길 수 있고, 종이에 아직 힘이 남아 있다.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훨씬 젊은 책은 다르다.
페이지 끝이 갈색으로 변했고, 종이를 살짝 구부리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오래된 신문처럼 바삭한 느낌이 나는 책도 있다.
나이만 놓고 보면 설명이 잘 되지 않는다.
500년 된 종이가 버티는데 100년 된 종이가 먼저 부서진다.
종이는 도대체 무엇이 다르게 늙는 걸까?

종이에도 ‘태생’이 있다
처음에는 오래된 종이라면 모두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종이를 만드는 재료부터 달랐다.
서양에서 오래전 사용했던 종이 가운데 상당수는 아마와 면 같은 섬유를 이용해 만들었다. 낡은 천을 원료로 사용했다고 해서 흔히 **넝마 종이(rag paper)**라고 부른다.
이런 식물섬유에는 종이의 뼈대를 이루는 **셀룰로오스(Cellulose)**가 들어 있다.
종이를 아주 가까이서 보면 하나의 평평한 판이 아니다.
수많은 섬유가 얽혀 있다.
그리고 이 섬유들이 얼마나 건강하게 남아 있느냐가 종이의 힘과 꽤 깊은 관계가 있다.
문제는 책과 신문이 폭발적으로 많이 필요해지면서 시작됐다.
19세기 무렵부터 서양의 제지산업에서는 값이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목재가 중요한 종이 원료가 됐다.
종이를 대량으로 만드는 데는 훨씬 유리했다.
하지만 모든 목재펄프 종이가 오래 버티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기계적으로 만든 펄프에는 **리그닌(Lignin)**이 많이 남을 수 있다.
리그닌은 나무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데 필요한 성분이다.
나무에게는 꽤 중요한 물질이다.
오래 보관해야 하는 종이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오래된 신문이 유난히 빨리 누렇게 변하는 이유
이 차이는 오래된 신문을 떠올리면 조금 쉽게 보인다.
서랍이나 책장 깊숙한 곳에서 몇십 년 된 신문을 꺼냈을 때 종이가 노란색을 넘어 갈색에 가까워진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가장자리도 쉽게 갈라진다.

신문용지에는 값싸게 많은 양을 만들 수 있는 기계펄프가 오랫동안 널리 사용됐다.
이런 종이는 리그닌이 많이 남아 있을 수 있고, 빛과 산화 같은 영향을 받으면서 색이 빠르게 어두워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해야 한다.
‘나무로 만든 종이 = 나쁜 종이’는 아니다.
현대의 종이는 목재를 원료로 하더라도 리그닌을 상당 부분 제거한 화학펄프를 사용하고, 산에 대응하기 위한 알칼리성 성분을 넣어 오래 보존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무엇으로 만들었느냐가 아니다.
어떤 섬유를 사용했고, 어떤 방식으로 종이를 만들었느냐가 함께 중요하다.
종이 안에서는 아주 천천히 끊어지는 일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종이가 바스러지는 순간에는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여기서 다시 셀룰로오스가 등장한다.
셀룰로오스를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면 긴 분자 사슬이라고 볼 수 있다.
종이가 건강할 때는 이 사슬이 충분히 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화학적인 변화가 일어나면 긴 사슬이 조금씩 끊어진다.
한 번.
또 한 번.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계속 쌓이면 어느 순간 종이의 물리적인 힘도 떨어진다.
처음에는 단지 색이 조금 누렇게 변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조금 더 진행되면 종이가 뻣뻣해진다.
심한 경우에는 접힌 부분이 갈라지고 페이지 모서리가 작은 조각으로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다.
보존 분야에서는 셀룰로오스 사슬이 끊어지는 이런 변화를 **사슬 절단(chain scission)**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원인 가운데 중요한 하나가 **산 촉매 가수분해(acid-catalyzed hydrolysis)**다.
이름은 꽤 거창하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부분은 간단하다.
종이 속 산성과 수분이 셀룰로오스의 분해를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오래된 종이를 다룰 때 산성화와 습도 이야기가 계속 등장한다.
책 가장자리만 유난히 갈색이라면
오래된 책을 펼쳐놓고 종이의 색을 가만히 보는 것도 재미있다.
페이지 가운데는 비교적 밝은데 바깥 가장자리만 짙은 갈색인 책이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손을 많이 타서 그런 줄 알 수도 있다.
하지만 원인이 그것만은 아니다.

종이는 주변 공기와도 계속 반응한다.
Library of Congress는 공기 중의 황·질소산화물 같은 오염물질이 종이에 흡수되어 산을 형성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페이지 중앙보다 가장자리가 더 갈색이고 약해진 책에서 이런 영향을 관찰할 수 있다.
빛도 영향을 준다.
온도가 높아지면 여러 화학반응이 빨라질 수 있다.
습도 역시 종이의 열화 속도와 관계한다.
결국 책 한 권이 책장에서 조용히 늙어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종이 안에서는 오랫동안 여러 변화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누렇게 된 종이를 다시 하얗게 만들면 될까?
여기까지 알고 나면 당연히 이런 생각이 든다.
산이 문제라면 중화하면 되지 않을까.
실제로 보존 분야에는 **탈산처리(Deacidification)**라는 방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오래된 종이를 새 종이로 되돌리는 기술은 아니다.
한번 심하게 약해진 셀룰로오스의 강도가 탈산처리만으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오래된 책이 누렇다는 이유만으로 집에서 어떤 용액을 바르거나 물에 담가 산을 빼내려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를 만들 수 있다.
책 한 권에는 종이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인쇄잉크가 있고, 필기한 잉크가 있을 수 있다.
접착제가 있고, 실과 가죽, 천 같은 제본재료도 함께 있다.
한 가지 재료를 위해 한 처리가 다른 재료에는 위험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보존에서는 늘 처리를 하기 전의 판단이 길다.
첫 번째 글에서 보았던 이야기가 여기에서도 다시 나온다.
먼저 고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알아보는 것.
결국 책의 나이만 봐서는 알 수 없었다
처음에는 조금 이상했다.
어떻게 500년 된 종이가 100년 된 종이보다 멀쩡할 수 있을까.
답은 의외로 ‘500년’이나 ‘100년’이라는 숫자에 있지 않았다.
어떤 섬유로 만들었는지.
종이를 만들 때 어떤 공정을 거쳤는지.
산성 성분은 얼마나 존재했는지.
어떤 빛과 온도, 습도 속에서 보관됐는지.
이 모든 것이 종이가 늙는 속도에 함께 영향을 준다.
그러고 나면 오래된 책을 보는 방법도 조금 달라진다.
누렇게 변한 페이지가 전처럼 단순한 ‘오래된 종이’로만 보이지 않는다.
가장자리의 갈색도 눈에 들어온다.
종이를 넘길 때 느껴지는 뻣뻣함도 전에 없던 정보가 된다.
책의 연대는 표제지에서 찾을 수 있지만, 종이가 살아온 시간은 종이 자체에 남아 있다.
그런데 오래된 책에서 발견되는 흔적 가운데는 아직 설명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종이 위에 후추를 뿌린 것처럼 흩어져 있는 작은 갈색 점들이다.
곰팡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곰팡이라고 생각해서 책을 버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오래된 종이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폭싱(Foxing)**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갈색 반점의 정체를 들여다본다.
REFERENCES
Library of Congress
The Deterioration and Preservation of Paper: Some Essential Facts
Library of Congress
The Barrow Book Collection: Characterization and Access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
Caring for Paper Objects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
Basic Care – Paper Documents and Newspaper Clippings
voucher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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