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난 작은 구멍, 책벌레는 아직 안에 있을까?
오래된 책을 넘기다가 아주 작은 구멍 하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바늘 끝으로 찌른 것처럼 둥근 구멍이다.
그런데 한 장을 넘겨도 같은 자리에 구멍이 있다.
두 장, 세 장, 열 장을 넘겼는데도 계속 이어진다.
그제야 조금 이상해진다.
누군가 종이를 뚫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책 안을 지나간 흔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흔적을 보면 흔히 ‘책벌레’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런데 책벌레라는 이름의 곤충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보존 분야에서 말하는 Bookworm은 책과 종이 안으로 파고들어 피해를 주는 여러 딱정벌레류의 유충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에 가깝다.
말 그대로 책을 먹으며 지나가는 벌레인 셈이다.
책 속에서 길을 만든다
종이만 보면 벌레가 먹을 만한 것이 별로 없어 보인다.
하지만 책 한 권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재료가 들어 있다.
종이가 있고,
전분계 접착제가 있고,
천이나 실이 있고,
책에 따라서는 가죽이나 양피지도 사용된다.
일부 곤충에게는 이런 재료가 먹이나 서식환경이 될 수 있다.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는 종이 자료에서 흔히 문제가 되는 해충으로 좀벌레(silverfish), 바퀴류, 다듬이벌레(booklice), 그리고 여러 딱정벌레류의 유충인 이른바 책벌레를 언급한다.
이들이 남기는 흔적도 서로 조금씩 다르다.
좀벌레는 종이 표면을 얕게 갉아 표면이 긁혀나간 것처럼 만들 수 있다.
반면 일부 딱정벌레 유충은 책의 두꺼운 본문 블록 안쪽으로 들어가며 터널을 만든다.
한 페이지에서 시작한 작은 구멍이 여러 장 뒤에서도 계속 발견되는 이유다.

책을 덮어놓으면 작은 구멍 몇 개에 불과해 보인다.
하지만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기다 보면 길 하나가 나타난다.
어떤 것은 거의 직선으로 이어지고,
어떤 것은 중간에서 방향을 바꾸며 종이 사이를 지나간다.
작은 유충이 책 안에서 이동했던 흔적이다.
오래된 책의 손상을 보고 있으면 가끔 이런 부분이 묘하다.
벌레는 이미 사라졌는데 벌레가 움직였던 길만 수십 년, 때로는 그보다 훨씬 오래 남아 있는 것이다.
구멍이 있다고 지금도 벌레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가장 궁금한 문제가 생긴다.
책에 구멍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도 그 안에 벌레가 있을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구멍은 과거에 발생한 충해가 남긴 흔적일 수도 있다.
오래전에 벌레가 빠져나간 뒤 책이 안정적인 환경으로 옮겨졌다면 손상만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보존에서는 구멍 자체와 현재 진행 중인 충해를 구별하려고 한다.
이때 눈여겨보는 것 가운데 하나가 **프라스(Frass)**다.
처음 들으면 생소한 단어다.
쉽게 말하면 곤충이 남긴 배설물이나 갉아낸 재료의 부스러기다.
책을 움직이지 않았는데 작은 구멍 아래로 종이색과 비슷한 미세한 가루가 계속 쌓인다면 현재의 활동을 의심해 볼 만한 단서가 된다.
Northeast Document Conservation Center는 오래되고 짙은 출구 구멍만 있고 새로운 프라스가 없다면 과거의 충해일 가능성이 있으며, 반대로 활동성 충해에서는 프라스가 중요한 징후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다만 여기에서도 한 가지 흔적만으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
책을 옮기면서 과거에 구멍 속에 남아 있던 부스러기가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제 보존현장에서는 살아 있는 곤충이나 유충, 탈피한 껍질, 새로운 구멍, 프라스의 지속적인 발생 등을 함께 살핀다.
한 번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변화가 있는지를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책벌레보다 더 작은 벌레도 있다
이름 때문에 가장 헷갈리는 곤충도 있다.
**다듬이벌레(Booklice)**다.
영어 이름만 보면 정말 책을 갉아먹는 이처럼 들린다.
하지만 딱정벌레 유충이 만드는 책 속 터널과는 성격이 다르다.
다듬이벌레는 아주 작고 습한 환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높은 습도에서 생기는 미세한 곰팡이 등을 먹기 때문에 책이나 종이 주변에서 다듬이벌레가 발견된다면 단순히 벌레만 볼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이 지나치게 습하지 않은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선 글에서 폭싱과 곰팡이를 살펴볼 때도 습도가 등장했다.
이번에도 다시 나타난다.
고서에서 생기는 문제들이 완전히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의미다.
습기가 오래 지속되면 곰팡이 위험이 커지고,
일부 해충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도 만들어질 수 있다.
책에 난 작은 구멍 하나가 사실은 보관환경 전체를 다시 살펴보라는 신호일 수도 있다.
벌레가 의심되면 살충제부터 뿌리면 될까?
책 속에 살아 있는 벌레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살충제다.
하지만 오래된 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정용 살충제를 고서에 직접 뿌리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
살충제 성분이나 용제가 종이와 잉크, 가죽, 접착제 등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기 어렵고, 잔류물 자체가 또 다른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 보존기관에서는 이런 문제를 단순히 ‘벌레를 죽이는 일’로 보지 않는다.
**통합적 해충관리(Integrated Pest Management, IPM)**라는 방법을 사용한다.
말은 거창하지만 핵심은 의외로 현실적이다.
벌레가 들어오는 길을 줄이고,
음식물과 먼지 같은 유인요인을 관리하고,
새로 들어오는 자료를 확인하고,
트랩 등을 이용해 어떤 곤충이 나타나는지 관찰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다른 자료와 분리한 뒤 적절한 대응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즉 벌레 한 마리를 잡는 것보다 왜 이곳에서 벌레가 살아갈 수 있었는지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

전문기관에서는 상황과 자료의 특성에 따라 저온처리나 저산소 처리 같은 방법이 검토되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재료의 종류와 상태, 처리 조건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다.
오래된 책을 발견했다고 집 냉동실에 바로 넣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이유다.
작은 구멍은 이미 지나간 사건일 수도 있다
처음에는 책에 난 구멍 하나가 문제였다.
그런데 조금 따라가 보니 이야기가 꽤 멀리 이어진다.
종이와 접착제 같은 책의 재료가 등장하고,
곤충의 생활사가 등장하고, 습도와 곰팡이까지 연결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구멍의 개수가 아니었다.
지금도 손상이 진행되고 있는가.
오래된 구멍 몇 개만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끝난 사건의 흔적일 수 있다.
반대로 어제 없었던 가루가 오늘 다시 쌓이고, 새로운 구멍이나 곤충이 발견된다면 현재 진행 중인 문제일 가능성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오래된 책에서 작은 구멍을 발견하면 바로 무언가를 뿌리거나 막으려고 하기보다 먼저 책과 주변을 살펴보는 편이 낫다.
구멍 아래에 가루가 있는지.
선반에도 비슷한 흔적이 있는지.
주변의 다른 책에서도 새 구멍이 발견되는지.
공간이 지나치게 습하지는 않은지.
새로운 곤충이 보이지는 않는지.
이 정도만 관찰해도 구멍 하나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꽤 많다.
그리고 다음에 오래된 책을 펼쳤을 때 작은 구멍이 여러 페이지를 관통하고 있다면 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일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종이가 없어진 자리가 아니다.
언젠가 작은 생물이 그 책 안을 지나갔다는 흔적이다.
다음에는 벌레와는 전혀 다른데도 오래된 책에서 자주 만나는 냄새를 따라가 본다.
책장을 열었을 때 올라오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
흔히 우리는 그것을 그냥 ‘오래된 책 냄새’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냄새는 정말 책이 오래돼서 나는 것일까?
REFERENCES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
Caring for Paper Objects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
Preventing Infestations: Control Strategies and Detection Methods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
Agent of Deterioration: Pests
Northeast Document Conservation Center
Integrated Pest Management
voucher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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