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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종이를 빛에 비추면 왜 줄무늬가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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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 한 장을 창가에 들어 올렸을 때다.

평소에는 잘 안 보이던 가느다란 줄이 종이 전체에 떠오른다.

어떤 줄은 촘촘하고, 어떤 줄은 그보다 훨씬 띄엄띄엄 있다.

처음 보면 종이가 눌린 자국 같기도 하고, 오래 보관하면서 생긴 주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줄은 손상이라기보다 태어날 때부터 종이 안에 들어 있던 흔적에 가깝다.

쉽게 말하면 종이가 어떤 틀 위에서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자국이다.

창가 빛에 비춘 오래된 고서의 종이 한 장에 가느다란 촘촘한 줄과 더 굵고 넓은 간격의 줄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모습

그 줄은 인쇄가 아니라 종이의 골격이다

오래된 수제 종이는 대개 물에 푼 섬유를 틀로 떠서 만들었다.

그 틀 바닥에는 가는 선들이 아주 촘촘하게 깔려 있고, 그 아래에는 조금 더 굵고 간격이 넓은 지지선이 받치고 있다.

종이섬유는 그 위에 얹혀 물이 빠지며 한 장의 종이로 굳는다.

이때 가는 선 자국이 laid lines, 넓은 간격의 선 자국이 chain lines다.

눈에 익은 말로 바꾸면, 촘촘한 결이 먼저 있고 그 결을 떠받치는 큰 골격이 따로 있는 셈이다.

이 줄은 나중에 누가 그어 넣은 것이 아니다.

종이를 만들던 틀의 구조가 그대로 남은 결과다.

그래서 오래된 종이를 보면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을 통과시켜 안쪽 구조까지 보게 된다.

종이 한 장이 갑자기 물건이 아니라 제작 도구의 흔적을 품은 기록물처럼 보이는 순간이다.

왜 평소엔 잘 안 보이다가 빛에 비추면 드러날까?

종이 표면만 보면 이런 줄은 흐릿하거나 거의 보이지 않을 때가 많다.

하지만 뒤에서 빛이 들어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느다란 철선 위에 형성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은 섬유의 두께와 밀도가 아주 조금씩 다르다.

그 차이가 투과광에서 더 또렷하게 보인다.

즉, 줄무늬가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이 빛 덕분에 드러나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워터마크도 평소보다 빛에 비출 때 더 잘 보인다.

그래서 종이를 읽는 사람들은 단순히 글자만 읽지 않는다.

빛도 함께 사용한다.

책장을 넘기며 본문을 읽다가도, 창 쪽으로 종이를 기울여 종이의 결을 먼저 확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오래된 종이에 이런 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종이라고 해서 전부 줄무늬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표면이 비교적 매끈하고 그물처럼 고르게 만들어진 wove paper는 laid pattern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종이에 줄이 보인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이 종이가 전통적인 laid paper인지, 조금 더 균일한 방식으로 만든 paper인지, 적어도 어느 계열의 제작 방식을 가졌는지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이 나온다.

오래된 책을 볼 때 사람들은 흔히 활자나 삽화, 표지 장정에 먼저 눈을 준다.

그런데 종이 자체를 보면 또 다른 정보가 나온다.

본문이 말해주지 않는 것을 종이의 결이 말해주는 셈이다.

오래된 수제 종이를 만들던 철선 틀 구조가 떠오르도록 가는 선과 지지선의 방향이 드러난 전통 종이 제작의 질감 표현

줄 방향이 바뀌면 책 속의 다른 이야기가 보인다

이 줄은 그저 예쁜 무늬가 아니다.

가끔은 책의 이력까지 드러낸다.

예를 들어 한 권의 책에서 대부분의 장은 비슷한 간격과 방향의 줄을 보이는데, 유독 한 장만 줄 방향이나 간격이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장은 나중에 교체됐거나, 다른 종이로 보수됐거나, 애초에 다른 종이 묶음에서 들어왔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서지학이나 보존조사에서 종이의 chain line 간격, laid line 밀도, 워터마크 위치를 유심히 보는 이유도 같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종이의 구조는 꽤 솔직하다.

활자는 속일 수 있어도 종이의 결까지 똑같이 맞추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이의 줄무늬는 때로 “이 한 장은 다른 장들과 같은 출신이 아니다” 하고 먼저 말해준다.

줄무늬는 접힌 책의 구조도 살짝 알려준다

인쇄기가 흔하지 않던 시기의 책은 큰 종이에 여러 면을 인쇄한 뒤 접어서 만들었다.

그 종이가 반으로 접혔는지, 한 번 더 접혔는지에 따라 책의 판형과 구조가 달라진다.

그 과정에서 chain lines의 방향이나 워터마크가 놓인 위치가 서지학적인 단서가 된다.

이건 아주 작은 차이 같지만, 책이 원래 어떤 형식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짚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빛에 비친 줄무늬는 단순히 “수제 종이구나”에서 끝나지 않는다.

조금 더 들어가면 이 종이가 어떤 틀에서 떴는지, 다른 장과 같은 묶음인지,
책이 어떻게 접혀 제본됐는지까지 이어진다.

줄 몇 개가 종이의 이력서를 대신 쓰고 있는 셈이다.

오래된 종이는 가까이 보면 더 많은 걸 말한다

고서를 볼 때 사람들은 흔히 누렇게 변한 색이나 얼룩부터 본다.

그런데 빛에 비춰 나타나는 줄무늬를 한 번 알고 나면 시선이 달라진다.

이제는 종이를 ‘글이 적힌 바탕’으로만 보지 않게 된다.

그 종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다른 장과 같은 집안인지, 어디쯤에서 워터마크가 숨어 있을지도 궁금해진다.

오래된 책의 한 장을 빛에 비추자 줄무늬 사이로 희미한 워터마크까지 드러나기 시작하는 순간

눈에 잘 띄지 않던 줄무늬는 사실 종이의 결함이 아니라 출생의 흔적이었다.

빛에 비추었을 때 비로소 보이는 이유도, 종이가 표면만으로는 다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래된 종이는 늘 조용하다.

하지만 빛 앞에서는 조금 더 수다스러워진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책의 내용은 활자가 말하지만, 책의 몸은 종이가 말한다.

다음 글에서는 이 줄무늬 사이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단서, 워터마크를 본다.

왜 어떤 종이에는 왕관이나 손, 동물, 문자 같은 그림이 숨어 있을까?

그 작은 그림 하나로 종이의 산지와 시기를 짐작하는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REFERENCES

Getty Research Institute
Categories for the Description of Works of Art

KB, National Library of the Netherlands
Watermarks in Incunabula printed in the Low Countries (WILC)

British Library
Archives and Manuscripts Catalogu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A Tale of Two Sultans Part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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