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를 싸는 종이와 상자는 왜 아무 제품이나 쓰지 않을까?
오래된 책 한 권을 소중하게 보관하려고 한다.
먼지가 묻지 않게 종이로 감싸고, 튼튼한 상자에 넣어두면 될 것 같다.
문구점에서 크라프트지를 사고 예쁜 종이상자를 하나 고른다.
보기에는 꽤 그럴듯하다.
그런데 보존기관에서 오래된 책을 보관하는 모습을 보면 사용하는 종이와 상자가 조금 다르다.
색도 화려하지 않고 장식도 없다.
대신 제품 설명에는 이런 단어들이 적혀 있다.
Acid-free.
Lignin-free.
Buffered.
상자 하나 고르는 데 왜 이렇게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한 걸까?

상자도 결국 종이로 만들어진다
책을 보호하려고 종이상자에 넣었는데 그 상자가 오히려 책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
하지만 일반적인 종이와 판지 가운데 상당수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산성화될 수 있는 성분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리그닌(Lignin)**이다.
리그닌은 나무에 자연스럽게 들어 있는 성분이다.
목재펄프로 만든 종이에 많이 남아 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종이가 누렇게 변하고 산성화되는 데 관여할 수 있다.
문제는 책과 상자가 오랫동안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NEDCC는 품질이 좋지 않은 산성 폴더나 상자에서 생긴 산성 성분이 안에 들어 있는 종이자료로 이동해 변색과 열화를 촉진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책을 보호하려고 만든 상자가 새로운 열화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장기 보존용 종이와 판지를 고를 때 acid-free와 lignin-free 여부를 확인한다.
단순히 상자가 두껍고 튼튼한지만 보는 것이 아니다.
‘무산성’이라고 적혀 있으면 끝일까?
여기서 또 하나 헷갈리는 말이 등장한다.
**무산성(Acid-free)**이다.
이 단어만 보면 산이 전혀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산성화되지 않는 종이라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Library of Congress는 새로 만들어진 많은 종이와 판지가 처음에는 무산성 조건을 만족할 수 있어도, 재료가 노화하면서 이후 산성 성분이 생성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장기보존용 재료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알칼리 완충재(Alkaline buffer)**를 넣기도 한다.
보통 탄산칼슘 같은 알칼리성 물질을 종이나 판지에 포함시켜 앞으로 생성될 산을 어느 정도 중화하도록 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하면 책 주변에 작은 완충장치를 하나 더 두는 셈이다.
그래서 일반적인 책과 종이자료에서는
무산성 + 리그닌 프리 + 알칼리 완충
조건을 갖춘 수납재가 많이 사용된다.

그렇다고 완충된 종이가 세상의 모든 자료에 정답인 것도 아니다.
청사진인 시아노타입처럼 알칼리에 민감한 일부 자료나 특정 사진·안료는 완충되지 않은 재료가 더 적절할 수 있다.
고서 한 권 안에도 사진이나 특수한 삽지가 들어 있을 수 있다.
또다시 같은 결론이 나온다.
좋은 보존재료도 대상에 따라 달라진다.
‘아카이벌’이라고 쓰여 있으면 믿어도 될까?
보존용품을 찾아보면 유난히 많이 보이는 단어가 있다.
Archival.
아카이벌 박스.
아카이벌 페이퍼.
아카이벌 파일.
이름만 보면 기록보존기관에서 사용하는 특별한 등급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Library of Congress와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는 이 표현 자체만으로는 보존 적합성을 판단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archival이라는 단어가 붙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특정한 보존 기준을 만족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제품명보다 실제 사양을 보는 편이 낫다.
산성도는 어떤지.
리그닌이 제거된 재료인지.
완충재가 들어 있는지.
책과 직접 맞닿아도 되는 재료인지.
플라스틱이라면 어떤 종류인지.
‘보존용’이라는 광고문구보다 재료가 무엇인지가 더 중요하다.
상자가 너무 크면 더 안전하지 않을까?
좋은 재료로 만든 상자를 찾았다.
이번에는 크기 문제다.
책보다 넉넉하게 큰 상자를 고르면 충격도 덜 받을 것 같다.
하지만 책이 상자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일 정도로 크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상자를 옮길 때마다 책이 안쪽에서 미끄러진다.
모서리가 벽에 부딪히고, 약한 표지가 움직이고, 이미 떨어진 책등 조각이 다른 곳으로 굴러갈 수도 있다.
반대로 상자가 지나치게 작으면 책을 넣고 꺼낼 때 표지와 모서리가 계속 마찰한다.
가죽 장정처럼 표면이 약한 책이라면 이것도 부담이다.
CCI는 보존용 수납재가 대상의 크기에 맞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책이 안에서 돌아다니지 않으면서도 억지로 밀어 넣지 않아도 되는 정도다.

이런 맞춤 상자의 장점은 하나 더 있다.
이미 떨어진 조각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책등 가죽 한 조각.
표지 모서리의 작은 파편.
제본에서 떨어진 종이 조각.
당장 다시 붙이지 않더라도 책과 함께 상자 안에 보관할 수 있다.
나중에 보존처리를 할 때 중요한 자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상자는 책을 ‘밀봉’하는 물건이 아니다
상자는 책을 ‘밀봉’하는 물건이 아니다
책을 보호한다는 것과 외부 공기를 완전히 차단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보존용 상자의 중요한 역할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하는 데 있지 않다.
먼지가 직접 닿는 것을 줄이고,
빛에 노출되는 정도를 줄이고,
책을 옮길 때 손상되지 않도록 지지하고,
약해진 표지와 책등을 보호한다.
서가에서 옆 책과 계속 마찰하는 것도 줄여준다.
CCI는 적절한 수납재를 책의 첫 번째 물리적 보호층으로 본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상자도 습한 지하실을 좋은 보존환경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상자 안에 넣었다고 높은 습도와 고온, 누수 위험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상자는 환경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보존환경 위에 하나의 보호층을 더하는 것에 가깝다.
그렇다면 모든 오래된 책을 상자에 넣어야 할까?
그것도 아니다.
구조가 안정적이고 자주 사용하는 일반적인 책이라면 적절한 서가에 올바르게 세워 보관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수 있다.
개별 상자가 특히 도움이 되는 것은 이런 책들이다.
표지가 떨어져 있는 책.
가죽가루가 계속 발생하는 책.
제본이 약해 옆 책과의 마찰이 부담스러운 책.
형태가 특이하거나 매우 작은 책.
떨어져 나온 조각을 함께 보관해야 하는 책.
빛과 먼지에 대한 추가 보호가 필요한 자료.
책마다 상태가 다르니 보호방법도 달라진다.
좋은 수납재는 책을 멋있게 포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책이 지금 가진 형태를 더 이상 잃지 않도록 받쳐주는 도구다.
평범한 상자 하나에도 보존의 생각이 들어 있다
처음에는 그저 상자였다.
책보다 조금 큰 종이상자 하나면 충분해 보였다.
그런데 들여다보니 생각할 것이 제법 많았다.
상자를 만든 종이는 산성화되지 않는지.
리그닌은 얼마나 제거됐는지.
완충재는 필요한지.
책 크기에 맞는지.
책의 재질과 충돌하지는 않는지.
그래서 보존기관의 상자들이 조금 심심하게 생긴 데에도 이유가 있다.
눈에 띄기 위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상자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책이다.
좋은 보존용 상자는 특별한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빛을 조금 막아주고, 먼지를 조금 막아주고, 책이 쓰러지지 않게 잡아주고, 떨어진 조각을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
그렇게 수십 년을 조용히 버틴다.
고서를 지키는 재료는 강하거나 화려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오래 곁에 있어도 책을 방해하지 않아서 좋은 것이다.
REFERENCES
Library of Congress
Storing Your Books
Library of Congress
Care, Handling and Storage of Works on Paper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
Making Enclosures for Books and Paper Objects
Northeast Document Conservation Center
Storage Enclosures for Books and Artifacts on Paper
vouchermate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