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의 페이지 번호가 틀린데도 오자가 아닐 수 있다?
오래된 책을 넘기다가 이상한 숫자를 발견한다.
페이지가 잘 이어지다가 갑자기 숫자 하나가 건너뛴다.
어떤 책은 같은 숫자가 두 번 나오고, 또 어떤 책은 한쪽 면에만 번호가 있다.
책 아래쪽에는 페이지 번호와 상관없어 보이는 알파벳과 숫자까지 찍혀 있다.
처음에는 인쇄가 엉망인 책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래된 책에서는 숫자가 이상하다는 이유만으로 곧바로 오류라고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가 페이지 번호라고 생각한 숫자가 애초에 페이지를 세는 숫자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 장과 한 페이지는 같은 말이 아니다
먼저 아주 간단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종이 한 장을 집어 들면 앞면과 뒷면이 있다.
책 연구에서는 이 종이 한 장을 leaf라고 한다.
그 앞면 하나와 뒷면 하나가 각각 page다.
따라서 종이 한 장에는 두 페이지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보통 앞뒤 면을 각각 1, 2, 3, 4처럼 세는 pagination에 익숙하다.
그런데 옛날 책에서는 종이의 양면이 아니라 종이 한 장 자체에 번호를 붙이는 방식도 널리 사용했다.
이것이 foliation이다.
보통 종이의 앞면에 숫자를 적고, 뒷면에는 번호를 반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책을 펼쳤을 때 한쪽에는 25라는 숫자가 있는데 맞은편에는 아무 번호도 없을 수 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26이 나타난다.
현대의 페이지 번호 감각으로 보면 중간 숫자가 빠진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빠진 것이 아니다.
애초에 페이지가 아니라 종이 장수를 세고 있었던 것이다.
더 이상한 것은 인쇄하기 전의 페이지다
초기 인쇄소의 작업대로 가면 숫자는 훨씬 더 이상해진다.
지금은 책을 펼치면 1, 2, 3, 4…
순서대로 페이지가 나타난다.
하지만 인쇄할 때부터 종이가 그 순서로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손으로 인쇄하던 시대에는 큰 종이 한 장에 여러 페이지를 한꺼번에 인쇄했다.
예를 들어 큰 종이를 두 번 접어 만드는 quarto에서는 한 장의 종이가 네 장의 leaf, 즉 여덟 페이지가 된다.
그런데 펼쳐진 종이에 1, 2, 3, 4를 차례대로 배치하면 접었을 때 순서가 엉망이 된다.
그래서 인쇄판 위에서는 페이지들이 일부러 뒤섞인 것처럼 배치된다.
Folger Shakespeare Library가 설명하는 quarto의 한 예에서는 1페이지 옆에 8페이지가 놓이고, 다른 위치에는 4와 5가 서로 마주보는 식으로 인쇄된다.
심지어 어떤 페이지는 거꾸로 놓인다.
그 상태만 보면 인쇄소가 크게 실수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종이를 정해진 방식으로 접으면 신기하게도
1, 2, 3, 4, 5, 6, 7, 8 순서가 완성된다.
이 페이지 배치를 imposition이라고 한다.

책의 순서는 인쇄판 위에서 보이는 순서가 아니라 접힌 뒤에 완성되는 순서였던 것이다.
그래서 페이지 번호보다 더 중요한 표시가 있었다
큰 종이를 여러 번 접었다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접힌 묶음 여러 개를 차례대로 모아야 한다.
여기서 순서가 바뀌면 책 전체가 엉망이 된다.
그래서 초기 인쇄본에는 본문 아래쪽에 작은 표시가 찍혀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A
A2
A3
다음 묶음에는
B
B2
B3
같은 방식이다.
이것을 signature mark라고 한다.
여기서 A나 B는 종이 묶음의 순서를 나타내고 숫자는 그 묶음 안에서 어느 leaf인지 알려준다.
독자를 위한 페이지 번호와는 목적이 달랐다.
원래는 인쇄된 종이를 제대로 접고 제본하기 위한 작업 표시였다.
그래서 오래된 책을 연구할 때는 페이지 번호보다 signature mark가 더 믿을 만한 경우도 있다.
Folger Shakespeare Library는 초기 책에서 pagination과 foliation이 없거나, 있더라도 반드시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위치를 표시할 때 signature mark를 이용하는 관행이 있다고 설명한다.
숫자가 틀렸는데 책은 정상일 수도 있다
이제 정말 이상한 경우가 나온다.
책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종이 묶음도 정상이다.
그런데 인쇄된 페이지 숫자만 틀렸다.
예를 들어 124 다음 페이지에 실수로 125가 아니라 152가 찍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말 그대로 페이지 번호를 조판하면서 생긴 오류일 가능성이 있다.
당시 페이지 숫자 역시 금속 활자를 하나씩 조합해 인쇄했기 때문이다.
숫자 하나를 잘못 집어 넣으면 본문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도 페이지 번호만 틀릴 수 있다.
실제 희귀본 목록에는 이런 사례가 적지 않다.
Folger Shakespeare Library의 한 1629년 책에는 아예 도서목록에 “numerous errors in pagination”, 즉 페이지 번호에 많은 오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실제 페이지 순서는 signature collation을 통해 판단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오류를 현대 책처럼 반드시 ‘수정해야 할 결함’으로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판본의 여러 책에서 똑같은 오류가 발견된다면 그 실수 자체가 특정 인쇄판이나 판본을 구별하는 특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숫자가 오히려 책의 신분증이 되기도 한다
두 권의 오래된 책이 있다.
제목도 같다.
출판연도도 같다.
출판자도 같다.
겉보기에는 완전히 같은 판본처럼 보인다.
그런데 한쪽은 120페이지가 정상이고, 다른 한쪽은 120이 102로 잘못 인쇄되어 있다.
또 특정 페이지에서 단어 하나가 수정돼 있다.
이런 차이를 계속 비교하면 두 책이 정확히 같은 인쇄 상태에서 나온 것인지, 인쇄 도중 활자가 수정되었는지 등을 연구할 단서가 된다.
초기 인쇄에서는 모든 책이 오늘날 대량생산품처럼 완전히 동일하다고 가정할 수 없다.
인쇄하는 도중 활자를 수정하기도 했고,
종이를 새로 끼우기도 했으며, 잘못 인쇄된 부분을 바로잡기도 했다.
따라서 사소해 보이는 숫자 오류도 경우에 따라서는 책이 언제, 어떤 상태에서 인쇄되었는지를 추적하는 증거가 된다.
틀렸기 때문에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라, 틀렸기 때문에 오히려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숫자보다 종이 묶음을 보면 진짜 문제가 보인다
페이지가 80에서 갑자기 97로 넘어갔다고 생각해 보자.
무조건 81~96페이지가 떨어져 나갔다고 판단하면 안 된다.
먼저 책의 물리적 구조를 살펴야 한다.
signature mark가 정상적으로 이어지는지, 종이 묶음이 빠져 있지는 않은지, 본문 문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지, 책등의 실 구조에서 유실된 흔적이 있는지 등을 함께 본다.
반대로 숫자는 정상인데 실제 leaf가 빠진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누군가 오래전에 한 장을 잘라냈다면 앞뒤 페이지 번호만 보고는 바로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오래된 책에서 중요한 질문은 “페이지 번호가 맞는가?” 하나가 아니다.
“이 책의 실제 물리적 순서가 맞는가?” 가 더 중요하다.
번호가 다시 1부터 시작한다고 오류는 아니다
오래된 책에서는 중간에 번호가 다시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앞부분과 본문을 별도로 구성했거나, 한 권 안에 여러 부분을 함께 묶었거나, 각 부분이 원래 독립적으로 인쇄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서문에는 로마숫자를 쓰고 본문에서 아라비아숫자를 새로 시작하는 방식도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따라서 숫자가 되돌아갔다고 곧바로 제본 오류라고 볼 수 없다.
책 전체의 구조를 먼저 봐야 한다.
한 권이라는 외형 안에 실제로는 여러 인쇄단위가 들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책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연속된 파일’ 같은 물건과 조금 다르다.
여러 장의 큰 종이를 인쇄하고, 접고, 묶고, 순서를 맞추고, 마지막으로 표지를 붙여 완성한 입체적인 구조물이었다.
틀린 숫자를 고치면 안 되는 이유
오래된 책에서 잘못 인쇄된 페이지 번호를 발견했다고 펜으로 올바른 숫자를 써넣으면 어떨까?
읽기는 편해진다.
하지만 자료로서는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원래 어떤 숫자가 인쇄되어 있었는지, 그 오류가 같은 판본의 다른 책에도 존재하는지, 언제 누가 숫자를 수정했는지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보존에서는 이런 인쇄 오류도 원자료의 일부로 취급한다.
필요하다면 목록이나 연구기록에서 “인쇄된 번호는 152이지만 실제 순서는 125” 처럼 설명하면 된다.
원본 자체를 현대적인 논리에 맞춰 고쳐놓을 필요는 없다.
오래된 책에서 숫자는 생각보다 믿을 수 없다
우리는 페이지 번호를 책에서 가장 확실한 정보라고 생각한다.
58 다음은 59이고, 59 다음은 60이다. 너무 당연해서 의심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초기 인쇄본에서는 조금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한 장을 세는 foliation일 수도 있고, 여러 부분이 따로 번호 매겨졌을 수도 있다.
단순한 조판 실수일 수도 있고, 번호는 틀렸지만 종이 묶음 자체는 완벽하게 정상일 수도 있다.
반대로 번호는 정상인데 실제 종이가 사라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책을 연구하는 사람은 숫자 하나만 보지 않는다.
페이지 아래의 signature mark를 보고, 종이 묶음을 보고,접힌 방향을 보고, 책등의 실까지 살핀다.
그러다 보면 처음에는 오류처럼 보였던 숫자가 오히려 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해주기 시작한다.
오래된 책에서 페이지 번호는 정답이라기보다 하나의 증거다.
그리고 가끔은 잘못된 숫자 하나가, 완벽하게 맞는 숫자보다 그 책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REFERENCES
Folger Shakespeare Library
Deciphering Signature Marks
Folger Shakespeare Library
DIY Quarto
Folger Shakespeare Library
Learning from Mistakes
Folger Shakespeare Library
Signature Statements in Book Cataloging
Gonville & Caius College, University of Cambridge
Foliation and Pagination
voucher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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