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 몇 가닥이 수백 장의 종이를 어떻게 붙잡고 있을까?
오래된 책을 펼쳐보면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수백 장이나 되는 종이가 들어 있는데 좀처럼 흩어지지 않는다.
풀로 전부 붙여놓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책 가운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가끔 실 한 가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제야 알게 된다.
이 많은 종이를 붙잡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실이라는 사실을.

종이를 한 장씩 꿰맨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수백 장의 종이를 차례대로 꿰맨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전통적인 서양 제본 가운데 많은 책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큰 종이를 한 번 또는 여러 번 접는다.
그러면 여러 페이지가 연결된 작은 종이 묶음이 만들어진다.
이런 묶음을 영어로 섹션(Section) 또는 **개더링(Gathering)**이라고 부른다.
그 묶음을 여러 개 차곡차곡 쌓은 뒤, 접힌 가운데 부분을 따라 실로 꿰매 연결한다.
책 옆에서 바라보면 종이 한 장 한 장이 아니라 작은 종이 묶음들이 줄지어 이어져 있는 구조인 셈이다.

이 방식에는 꽤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종이를 한 장씩 붙이는 대신 접힌 부분을 이용해 묶으면 각 페이지가 책 안쪽에서 안정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면서도 페이지는 넘길 수 있다.
책이라는 물건이 수백 년 동안 거의 같은 기본 형태를 유지한 데에는 이런 구조적인 이유도 있다.
그런데 실만으로 표지까지 붙잡을 수 있을까?
여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가면 또 다른 것이 나타난다.
**제본 지지대(Sewing supports)**다.
역사적인 서양 책에서는 시대와 제본방식에 따라 가죽끈이나 가공한 가죽끈, 끈(cord), 테이프 같은 재료 위로 종이 묶음을 꿰맨 경우가 있다.
실은 종이 묶음을 연결하고, 지지대는 책 전체를 가로지르며 그 힘을 받아준다.
그리고 그 지지대의 끝이 앞뒤 표지판까지 연결되는 구조도 많다.
말로만 들으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실제 구조를 보면 꽤 인상적이다.
종이 → 실 → 지지대 → 표지 이렇게 힘이 이어진다.
그래서 표지는 단순히 책 바깥에 붙여놓은 껍데기가 아니다.
책의 종류에 따라서는 내부 제본구조와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책 전체의 일부가 된다.
미 의회도서관도 역사적 제본에서 sewing support를 본문과 표지를 연결하는 핵심 구조 가운데 하나로 설명한다.
책등에 튀어나온 줄은 장식이 아니었다
오래된 가죽 장정 책의 책등을 보면 가로로 볼록한 줄이 여러 개 지나가는 경우가 있다.
골동품 분위기를 내기 위해 만든 장식처럼 보인다.
하지만 오래된 제본에서는 그 아래에 실제 제본 지지대가 놓인 경우가 있다.
실로 종이 묶음을 끈에 꿰매고 그 위를 가죽으로 감싸면서 책등 표면에도 형태가 드러난 것이다.

물론 책등에 줄이 있다고 해서 모두 같은 구조인 것은 아니다.
시대가 흐르면서 실제 끈과 관계없이 장식 목적으로 비슷한 모양을 만든 제본도 생겼다.
이런 점 때문에 고서를 겉모습만 보고 구조를 단정하면 안 된다.
같은 가죽 장정처럼 보여도 안쪽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수백 년을 버틴 건 실이 특별해서였을까?
여기쯤 오면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옛날 실이 그렇게 튼튼했던 걸까?
물론 재료도 중요하다.
하지만 오래된 책이 살아남은 이유를 단순히 ‘튼튼한 실’ 하나에서 찾기는 어렵다.
오히려 힘을 한 곳에 몰아주지 않는 구조가 중요하다.
책을 펼칠 때 페이지에서 생긴 힘은 접힌 종이 묶음과 실을 거쳐 여러 지점으로 분산된다.
제본 지지대가 있는 구조에서는 그 힘이 표지와 연결되는 부분까지 전달된다.
잘 만들어진 구조는 책이 움직일 때 각 부분이 조금씩 힘을 나누어 받는다.
그래서 제본은 단순히 종이를 묶는 기술이라기보다 작은 구조물을 설계하는 일에 가깝다.
반대로 이 연결 가운데 하나가 끊어지면 문제가 연쇄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실이 끊어지고, 지지대가 파손되고, 표지와 본문의 연결이 약해진다.
그러면 페이지 묶음이 흔들리고 결국 표지가 떨어질 수도 있다.
앞선 글에서 책등과 조인트가 왜 중요한지를 살펴봤다면, 이제 그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조금 보인다.
400년 넘은 책에서도 원래의 실을 남긴다
실제 보존 사례를 보면 이 구조의 중요성이 더 분명해진다.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가 보존처리한 Salzinnes Antiphonal이라는 16세기 대형 성가책이 있다.
책의 일부 제본은 후대에 수선되어 있었고, 표지를 연결하던 원래의 지지대는 힌지 부근에서 끊어진 상태였다.
그렇다고 보존가들이 책을 전부 풀어 새로 꿰매지는 않았다.
조사 결과 남아 있던 원래의 제본실과 지지 구조를 가능한 한 보존하기로 했다.
끊어진 부분에는 새로운 지지재를 연결해 기능을 보완했다.

여기에서 지난 글들의 이야기가 또 이어진다.
새로 만들 수 있다고 해서 전부 새로 만들지 않는다.
원래 남아 있는 구조가 책의 제작방식을 알려주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실 하나도 단순한 소모품이 아닐 수 있다.
어떤 방법으로 꿰맸는지, 지지대는 몇 개였는지,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지 살펴보면 그 책이 만들어진 방식에 대한 정보가 나온다.
제본 자체도 책의 내용만큼 연구 대상이 되는 이유다.
오래된 책 가운데를 억지로 벌리면 안 되는 이유
이 구조를 알고 나면 책을 펼치는 행동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책 가운데를 세게 눌러 180도로 펼치면 단순히 가죽 책등만 힘을 받는 것이 아니다.
안쪽에서는 종이 묶음과 실, 지지대가 함께 움직이고 있다.
오래되면서 이미 실이 약해졌거나 일부 지지대가 끊어진 책이라면 작은 힘도 새로운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오래된 책이 자연스럽게 120도까지만 열린다면 굳이 180도로 만들 이유가 없다.
책이 열리는 각도 자체가 그 책의 현재 상태를 알려주는 정보일 수 있다.
보존기관이 고서를 열람하거나 전시할 때 책 받침을 사용하는 것도 이런 구조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책을 닫으면 다시 보이지 않는다
책을 다시 덮는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실도 사라진다.
종이 묶음도 보이지 않는다.
겉에서는 다시 표지와 책등만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수십 개의 접힌 종이 묶음이 있고, 그것을 연결하는 실이 있으며, 제본 방식에 따라 그 힘을 받아주는 지지 구조가 숨어 있다.
우리가 책이라고 부르는 물건은 사실 종이를 쌓아 표지를 붙인 것보다 훨씬 복잡한 구조물이다.
그래서 수백 년 된 고서를 볼 때 내용만 오래된 것이 아니다.
그 종이를 접은 방식도, 실을 통과시킨 구멍도, 책등 안에 숨어 있는 지지대도 함께 수백 년을 지나왔다.
다음에 오래된 양장본을 펼치게 된다면 페이지 가운데를 한번 조심스럽게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작은 실 한 가닥이 보인다면 그것은 단순히 종이를 꿰매놓은 흔적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이 무너지지 않도록 오랫동안 내부에서 버텨온 구조의 일부다.
REFERENCES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
Basic Care of Books
Canadian Conservation Institute
The Salzinnes Antiphonal — Conservation Treatment of the Binding
Library of Congress
Rebacking Gouverneur Morris’s Set of Diderot’s Encyclopédie
Library of Congress
Conservation Corner: Historical Book Repair
voucher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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