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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책 맨 아래에 다음 페이지의 첫 단어가 적혀 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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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필사본이나 초기 인쇄본을 자세히 보다 보면 조금 이상한 단어를 발견할 때가 있다.

본문은 이미 끝났는데 페이지 맨 아래 여백에 단어 하나가 덩그러니 적혀 있다.

처음에는 낙서인가 싶다.

그런데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더 이상해진다.

아까 아래쪽에 적혀 있던 단어가 다음 페이지의 첫 단어와 정확히 같다.

우연이 아니다.

옛날 책에는 일부러 이렇게 적었다.

이 작은 단어의 이름은 **캐치워드(Catchword)**다.

중세 필사본의 페이지 맨 아래 여백에 작은 단어 하나가 적혀 있고 다음 페이지의 첫 단어와 이어지는 모습

책을 만들다가 순서가 뒤바뀌면 어떻게 했을까?

책을 만들다가 순서가 뒤바뀌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은 책을 인쇄하면 페이지 번호도 있고 기계가 순서대로 제본한다.

그런데 수백 년 전 책은 달랐다.

한 권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성된 상태로 써 내려간 것이 아니다.

큰 종이를 접어 여러 장의 작은 묶음을 만들고, 그 묶음에 글을 쓴 뒤 마지막에 차례대로 모아 실로 꿰맸다.

이런 접힌 종이 묶음을 콰이어(Quire) 또는 **개더링(Gathering)**이라고 한다.

큰 종이를 접어 만든 여러 개의 종이 묶음을 차례대로 연결하는 방식은 오래된 책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구조 가운데 하나였다.

문제는 책 한 권에 이런 묶음이 열 개, 스무 개씩 들어간다는 것이다.

제본하기 전에 묶음 하나가 순서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4번째 묶음 다음에 7번째가 들어갈 수도 있다.

글은 갑자기 끊기고 전혀 엉뚱한 내용이 이어진다.

그래서 필사자는 한 묶음의 마지막 페이지 아래쪽에 다음 묶음이 시작되는 첫 단어를 미리 적어두었다.

제본하는 사람은 다음 묶음의 첫 단어와 비교했다.

둘이 같으면 순서가 맞았다.

아주 단순하지만 꽤 영리한 방법이다.

지금으로 치면 ‘다음 장 확인 코드’였다

예를 들어 한 종이 묶음의 마지막 문장이 이렇게 끝난다고 해보자.

“그들은 해가 지기 전에 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페이지 맨 아래에 작게

그러나 라고 적혀 있다.

다음 묶음의 첫 페이지를 펼쳤더니

“그러나 왕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라고 시작한다.

그러면 제대로 이어진 것이다.

만약 다음 묶음 첫 단어가 ‘다음날’이라면 뭔가 잘못됐다.

다른 종이 묶음을 찾아야 한다.

여러 개의 접힌 종이 묶음이 제본 전 작업대에 놓여 있고 한 묶음 마지막 페이지 아래의 캐치워드와 다음 묶음 첫 단어가 일치하는 모습

페이지 번호만 보고 순서를 맞추는 것에 익숙한 지금의 눈에는 조금 낯설다.

하지만 당시 책 제작과정을 생각하면 상당히 실용적인 장치였다.

특히 필사본에서는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묶음을 나눠 써서 마지막에 하나의 책으로 합치는 경우도 있었다.

작은 단어 하나가 책 전체의 순서를 붙잡아주는 셈이다.

그런데 왜 어떤 책에는 매 페이지마다 있을까?

캐치워드를 찾아보다 보면 또 이상한 점이 생긴다.

어떤 필사본에서는 한 묶음이 끝나는 곳에만 나타난다.

그런데 후대의 인쇄본을 보면 거의 매 페이지 아래에 캐치워드가 있는 경우도 있다.

캐치워드의 쓰임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달라졌기 때문이다.

중세 필사본에서는 주로 콰이어의 순서를 확인하는 역할이 중요했다.

인쇄문화가 확산된 뒤에는 인쇄된 책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고, 어떤 책에서는 매 페이지 또는 페이지 뒷면 아래에 다음 페이지의 첫 단어를 넣었다.

이때는 제본과 제작 순서를 확인하는 기능뿐 아니라 독자가 다음 페이지로 자연스럽게 읽어나가도록 돕는 역할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의 독자는 페이지를 넘길 때 문장이 끊어진다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책이라는 형식 자체가 지금처럼 표준화되지 않았던 시기에는 이런 작은 장치가 꽤 유용했다.

캐치워드가 맞지 않는다면 더 재미있어진다

오래된 책을 조사할 때는 캐치워드가 있다는 사실보다 맞지 않을 때가 더 흥미로울 수 있다.

마지막에 적힌 단어는 ‘그러나’인데 다음 장은 전혀 다른 단어로 시작한다.

왜 그럴까?

중간에 종이 묶음 하나가 빠졌을 수도 있다.

후대에 다시 제본하면서 순서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어딘가에서 페이지가 잘려나갔을 가능성도 있다.

심지어 서로 다른 필사본의 일부를 나중에 한 권으로 묶은 책일 수도 있다.

National Library of Scotland는 캐치워드를 책의 물리적 구조와 과거 제작과정을 파악하는 단서 가운데 하나로 다룬다.

즉 캐치워드는 옛날 제본공만을 위한 표시가 아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은 책에서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찾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오래된 필사본의 마지막 페이지 캐치워드와 다음 장 첫 단어가 일치하지 않아 중간 종이 묶음의 유실 가능성을 조사하는 모습

캐치워드 주변에 그림까지 그린 사람도 있었다

더 재미있는 필사본도 있다.

캐치워드를 그냥 단어 하나로 적어두지 않았다.

작은 장식 테두리 안에 넣거나 동물과 사람 그림 속에 숨겨놓기도 했다.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 도서관이 소개하는 한 중세 필사본에는 캐치워드 주변에 물고기를 찌르는 사람, 개, 씨름하는 사람 같은 그림까지 그려져 있다.

실용적인 표시가 작은 장식공간이 된 것이다.

중세 필사본을 보면 이런 부분이 재미있다.

필요해서 만든 기능인데 사람이 거기에 굳이 장식을 더한다.

오늘날의 페이지 번호를 화려한 그림 속에 숨겨놓은 것과 비슷하다.

책을 만든 사람의 손길이 가장 사소한 곳에서도 보인다.

그런데 어느 순간 캐치워드가 사라졌다

오늘날 책에서는 캐치워드를 거의 볼 수 없다.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인쇄와 제본이 점점 표준화됐고 페이지 번호와 시그니처 마크(Signature marks) 같은 다른 순서 표시도 체계화됐다.

산업적인 인쇄와 제본에서는 종이 묶음을 사람이 단어 하나씩 확인해야 할 필요도 크게 줄었다.

수백 년 동안 쓰이던 작은 장치가 조용히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지금 오래된 책에서 캐치워드를 발견하면 조금 묘하다.

당시에는 너무 평범해서 아무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표시가,

오늘날에는 오히려 책이 만들어지던 과정을 보여주는 흔적이 됐기 때문이다.

페이지 아래 단어 하나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오래된 책에는 본문 밖에도 읽을 것이 많다.

종이를 빛에 비추면 laid lines가 나타났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워터마크가 숨어 있었다.

이번에는 페이지 아래 여백에 작은 단어 하나가 있었다.

처음에는 모두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씩 의미를 알고 나면 책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캐치워드는 책의 내용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 책을 어떻게 만들었는지를 설명한다.

종이 묶음이 어떤 순서로 이어졌는지, 중간에 없어진 부분은 없는지, 후대에 다시 제본된 흔적은 없는지를 살펴볼 단서가 된다.

수백 년 전 제본공이 실수하지 않으려고 적어둔 한 단어가 지금은 책의 과거를 조사하는 증거가 된 셈이다.

그래서 오래된 책을 볼 때는 본문만 읽으면 절반밖에 보지 못한다.

때로는 페이지 가장 아래에 있는 쓸모없어 보이는 단어 하나가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페이지 아래가 아니라 책등 바깥쪽으로 돌아가 본다.

오래된 가죽 장정 책등에 볼록하게 솟아 있는 가로줄.

우리는 흔히 멋을 내기 위한 장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초기에는 그 볼록한 줄 아래에 실제로 책 전체를 붙잡는 제본끈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끈이 없어졌는데도 볼록한 줄만 장식으로 남기도 했다.

책등의 가로줄도 처음부터 장식이었던 것은 아니다.

REFERENCES

Trinity College Library Cambridge
Catchwords

Folger Shakespeare Library
Glossary of Manuscript Terms

National Library of Scotland
The Auchinleck Manuscript — Glossary

The College of Physicians of Philadelphia, Historical Medical Library
Quires and Catchwords and Missing Folio, Oh 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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