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닫으면 사라지고 펼치면 나타나는 그림이 있다?
금박이 입혀진 오래된 책 한 권이 있다.
표지도 아름답지만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다.
책등을 보고, 표지를 열고, 다시 덮는다.
그런데 책의 페이지를 한쪽으로 살짝 밀어 부채처럼 펼치는 순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 나타난다.
강과 다리.
도시의 거리.
성당과 정원.
때로는 사람과 동물까지 그려져 있다.
책을 다시 닫으면 그림은 사라진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평범한 책의 옆면만 남는다.
마술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오래된 책 장식이다.
이것을 **포어에지 페인팅(Fore-edge painting)**이라고 한다.

그림은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먼저 fore-edge가 어디인지부터 보면 이해하기 쉽다.
책등의 반대편, 페이지를 넘길 때 손가락이 닿는 바깥쪽 가장자리를 fore-edge라고 한다.
그런데 숨겨진 fore-edge painting은 이 평평한 면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과 조금 다르다.
페이지를 한쪽으로 비스듬히 밀면 종이 가장자리가 계단처럼 조금씩 어긋난다.
화가는 그 상태에서 드러난 아주 좁은 면에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마른 뒤 페이지를 원래 위치로 되돌리면 어떻게 될까?
각 페이지에 그려진 그림 조각들이 다시 안쪽으로 숨어버린다.
평평하게 닫힌 책에서는 그림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책 가장자리에 금박까지 입히면 흔적을 알아채기가 더욱 어렵다.
그림은 책 표면에 숨겨진 것이 아니라, 페이지가 움직일 때만 서로 맞춰지는 위치에 숨어 있는 것이다.
책을 움직여야 그림이 완성된다
이 방식이 재미있는 이유는 그림이 책과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액자에 걸린 그림은 가만히 있어도 보인다.
fore-edge painting은 다르다.
책장을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여야만 이미지가 만들어진다.
닫혀 있을 때는 각 페이지에 그려진 부분이 서로 어긋나 있다.
페이지를 부채처럼 펼치면 그 조각들이 한쪽으로 정렬된다.
그때 비로소 하나의 풍경이 나타난다.
책 자체가 그림을 감추고 보여주는 장치인 셈이다.

그런데 모든 fore-edge painting이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하나 구분할 것이 있다.
책 가장자리에 그림을 그리는 전통 자체는 오래됐다.
초기의 fore-edge 장식 중에는 책을 닫아놓아도 바로 보이는 그림이나 글자가 있었다.
책 제목이나 소유자를 가장자리에 표시하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신기하게 보는 것은 그중에서도 vanishing fore-edge painting, 즉 닫으면 사라지는 방식이다.
이 기법은 17세기 무렵 영국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특히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인기를 얻었다.
인디애나대학교 Lilly Library는 18세기 후반 Edwards of Halifax의 책방이 이런 숨겨진 fore-edge painting의 유행에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이미 고급 제본으로 유명했던 책에 숨은 그림까지 더해지면서 책 자체가 하나의 호화로운 수집품이 된 것이다.
금박은 그림을 숨기는 커튼이었다
숨겨진 fore-edge painting을 더 재미있게 만드는 요소가 금박이다.
책을 닫았을 때 페이지 가장자리가 금빛으로 보이면 그 아래 그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어렵다.
Chetham’s Library가 소장한 1849년판 책도 비슷하다.
페이지를 비스듬히 펼치면 다리가 있는 풍경이 나타나지만, 책을 닫으면 금박 가장자리 뒤로 그림이 사라진다.
제작할 때는 페이지를 펼친 상태로 고정해 수채화를 그리고, 충분히 마른 뒤 다시 닫은 다음 가장자리를 금박으로 장식하는 방식이 사용됐다.
결과적으로 금박은 장식이면서 동시에 숨은 그림을 감추는 막이 된다.
책장에 꽂혀 있을 때는 누구도 안쪽에 풍경 하나가 숨어 있다고 쉽게 생각하지 못한다.

한 권에 그림이 두 개 숨어 있는 책도 있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책도 있다.
Double fore-edge painting이다.
페이지를 한쪽 방향으로 펼치면 첫 번째 그림이 나타난다.
반대 방향으로 펼치면 완전히 다른 두 번째 그림이 나온다.
그리고 책을 닫으면 둘 다 사라진다.
한 권의 책에 서로 다른 그림 두 점을 숨겨놓은 것이다.
Folger Shakespeare Library가 소개한 사례 가운데에는 페이지를 한 방향으로 펼치면 Covent Garden Theatre가 나타나고, 반대 방향으로 펼치면 Drury Lane Theatre가 나타나는 책도 있다.
그림 하나를 감추는 것도 정교한데, 각 페이지 가장자리의 양쪽 면을 이용해 두 장면을 따로 만들어낸 것이다.
책을 물리적인 구조물로 이해하지 못하면 만들기 어려운 장식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림이 책보다 훨씬 늦게 만들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오래된 책에서 fore-edge painting을 발견하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기 쉽다.
“이 책이 만들어질 때부터 있었던 그림이겠지.”
그런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책이 출판된 뒤 수십 년, 심지어 훨씬 뒤에 그림이 추가된 경우도 있다.
Folger Shakespeare Library가 소개하는 한 책은 1894년에 출판됐지만 fore-edge painting은 나중에 추가된 사례다.
Washington University Libraries에도 책의 출판연도와 그림이 그려진 시기가 다른 사례가 있다.
이 점은 고서를 볼 때 꽤 중요하다.
책 한 권의 모든 부분이 같은 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본문은 18세기, 현재의 제본은 19세기, fore-edge painting은 그보다 더 늦을 수도 있다.
한 권의 책에 서로 다른 시간이 겹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fore-edge painting 역시 책의 제작연대를 알려주는 단순한 표식이라기보다 그 책이 살아온 이력의 한 층으로 봐야 한다.
오래된 책이라면 한번씩 펼쳐봐도 될까?
여기까지 읽으면 금박 책을 볼 때마다 페이지를 밀어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희귀본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숨겨진 그림을 보려면 페이지 전체를 일정한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 행동을 반복하면 종이와 제본 구조에 부담을 줄 수 있다.
Washington University Libraries도 fore-edge painting을 공개 전시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로, 그림을 보기 위해 페이지를 구부리고 다뤄야 하는 과정이 반복되면 손상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한다.
특히 책등이 약하거나 종이가 바스러지는 오래된 책을 억지로 펼치는 것은 좋지 않다.
도서관이나 박물관 소장품이라면 직접 찾아보려고 페이지를 강제로 밀기보다 기관에서 제공하는 사진이나 디지털 자료를 보는 편이 안전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림을 보기 위해 책을 손상시키면 숨겨진 그림을 보존해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
아무도 모르는 그림이 아직 서가에 있을 수도 있다
fore-edge painting에는 재미있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너무 잘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금박 가장자리만 보고서는 그림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 수 있다.
실제로 대학 도서관에서는 소장하고 있던 책을 조사하다가 예상하지 못했던 fore-edge painting을 발견하기도 한다.
목록을 작성한 사람도 몰랐고, 책을 이전에 소유했던 사람도 몰랐을 가능성이 있다.
수십 년 동안 서가에 꽂혀 있던 평범한 책 속에 작은 풍경화 한 점이 계속 숨어 있었던 셈이다.
이런 점 때문에 fore-edge painting은 다른 책 장식과 조금 다르다.
금박은 보여주기 위한 장식이다.
표지의 문양도 보여주기 위한 장식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발견되기 전까지 존재조차 눈치채기 어렵다.
책은 꼭 펼쳐야만 비밀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책은 처음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다.
종이를 빛에 비추면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줄무늬가 나타나고, 그 사이에서 워터마크가 드러나기도 한다.
페이지 아래의 작은 캐치워드는 책의 순서를 알려주고, 책등의 볼록한 선 아래에는 실제 제본 구조가 숨어 있기도 한다.
이번에는 종이의 가장자리에 그림이 숨어 있었다.
공통점이 하나 있다.
오래된 책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안쪽에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빛을 비춰야 보이는 것도 있고, 구조를 알아야 이해되는 것도 있고, 페이지가 움직여야 나타나는 것도 있다.
fore-edge painting은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사례다.
책을 닫는 순간 그림이 사라진다.
다시 조심스럽게 펼치면 수백 개의 종이 가장자리가 맞춰지면서 풍경이 돌아온다.
책 한 권이 액자이면서 동시에 그림을 숨기는 장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책의 옆면도 그냥 페이지의 끝이라고만 볼 수 없다.
때로는 그 몇 밀리미터의 공간에, 아무도 보지 못한 풍경 하나가 수백 년 동안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REFERENCES
Folger Shakespeare Library
Fore-edge Paintings
Indiana University Lilly Library
Fore-Edge Paintings in the Lilly Library
Chetham’s Library
Fore-edge Painting
Washington University Libraries
Fore-Edge Paintings
voucher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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