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의 손때로 ‘가장 많이 읽힌 페이지’를 찾을 수 있을까?
오래된 책을 펼쳤는데 유난히 한 페이지만 까맣게 변해 있다.
페이지 아래쪽 모서리는 손때가 짙고, 종이는 다른 장보다 닳아 있으며, 어떤 그림은 특정 부분만 희미하게 벗겨져 있다.
처음 보면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관리를 잘못해서 더러워졌나 보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모든 얼룩이 단순한 오염은 아니다.
때로는 그 더러움이 누군가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남겨놓은 기록이 된다.

책에도 ‘많이 만진 자리’가 남는다
집에서 오래 사용하는 물건을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문손잡이는 사람들이 잡는 부분만 닳는다.
계단은 사람들이 자주 밟는 가운데 부분부터 마모된다.
책도 비슷하다.
페이지를 넘길 때 사람들은 매번 전혀 다른 곳을 잡지 않는다.
대개 비슷한 위치에 손가락이 간다.
수십 번, 수백 번, 오랜 시간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서 펼치면 손의 기름과 먼지가 조금씩 쌓이고 종이 또는 양피지 표면도 마모된다.
한두 번의 흔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사용이 누적되면 책에 패턴이 생긴다.
그리고 연구자는 그 패턴을 읽기 시작한다.
정말 손때만 보고 많이 읽은 페이지를 알 수 있을까?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미술사학자 Kathryn M. Rudy는 중세 기도서와 시간경(Book of Hours)에 남아 있는 손때의 농도를 측정해 어떤 부분이 많이 사용됐는지를 조사했다.
눈으로 “여기가 좀 더 더럽다”라고 판단하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덴시토미터(densitometer)**라는 장비를 이용했다.
표면에서 반사되는 빛의 정도를 측정해 페이지가 얼마나 어두워졌는지를 수치로 비교한 것이다.
그 결과 일부 필사본에서는 특정 텍스트가 있는 장에서 손때가 훨씬 짙게 나타났다.
특히 페이지를 넘길 때 손가락이 자주 닿는 바깥쪽 아래 여백에 오염이 반복적으로 축적되어 있었다.
연구자는 이를 통해 어떤 기도문이 다른 부분보다 더 집중적으로 사용됐는지를 추정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더러운 페이지가 독서 기록이 된 것이다.

많이 읽은 것과 많이 만진 것은 같은 말일까?
여기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페이지가 더럽다고 해서 누군가 그 문장을 수백 번 정독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자주 펼쳤을 수도 있고, 특정 의식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했을 수도 있고, 책을 잡는 방식 때문에 그 페이지에 유독 흔적이 많이 남았을 수도 있다.
여러 사람이 사용한 책이라면 흔적의 주인이 한 명인지조차 알기 어렵다.
따라서 보존학이나 서지학에서 이런 흔적은 보통 하나의 증거만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손때의 위치, 본문의 내용, 책의 구조, 마모 정도, 낙서와 메모, 접힌 모서리, 다른 페이지와의 차이를 함께 본다.
그럼에도 특정 구간에서 반복적인 사용 흔적이 집중된다면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사람이 남긴 행동의 패턴이 물질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그림은 얼굴과 입 부분만 닳아 있다
더 놀라운 사례도 있다.
중세 종교 필사본의 그림 가운데 특정 인물의 얼굴이나 몸 일부가 유난히 닳아 있는 경우가 있다.
단순히 손으로 페이지를 넘긴 흔적과는 위치가 다르다.
일부 신앙서에서는 독자가 성스러운 인물의 그림을 반복해서 만지거나 입을 맞추면서 표면의 안료가 마모된 것으로 해석되는 흔적이 발견된다.
그림 전체가 균일하게 늙은 것이 아니다.
특정 부분만 집중적으로 닳아 있다.
오늘날에는 책을 읽는다고 하면 눈으로 글자를 보는 행위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과거의 책은 반드시 그렇게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기도하고, 만지고, 입을 맞추고, 특정 이미지를 반복해서 바라보는 행위까지 책의 사용에 포함됐다.
책은 읽는 물건이면서 때로는 접촉하는 물건이기도 했다.
접힌 모서리도 독자의 행동이다
페이지 귀퉁이가 삼각형으로 접혀 있는 책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흔히 ‘개귀 접기’, dog-ear라고 부른다.
보존 측면에서는 종이에 반복적인 꺾임을 만들어 권장할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수백 년 된 책에 남아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무조건 펴서 흔적을 없애는 것이 항상 좋은 선택은 아니다.
어떤 페이지에 접힌 흔적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독자가 그곳을 다시 찾으려고 표시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백의 작은 점, 밑줄, 손가락 표시 모양, 종잇조각, 실 한 가닥도 비슷하다.
과거 독자에게는 실용적인 표시였지만 오늘날에는 독서행동을 추적하는 자료가 될 수 있다.
Library of Congress에서는 책의 얼룩에서 ‘사용자’를 찾기도 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보존과학 연구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책의 사용 흔적을 조사한 사례가 있다.
17~19세기에 만들어진 미술·회화 지침서를 연구하면서 페이지에 남은 색 얼룩과 재료를 분석했다.
이 책들이 단지 교양을 위해 읽힌 것인지, 아니면 실제 화가나 작업자가 작업실에서 참고했던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조사한 책에서는 페인트 시험 흔적, 색재료, 메모와 밑줄 같은 사용 흔적이 발견됐다.
특히 1749년에 인쇄된 한 책에서는 파스텔을 설명하는 부분 주변에 실제 노란색 파스텔 흔적이 있었고, 붉은 안료를 다루는 부분에는 붉은 수채 물감의 흔적이 확인됐다.
책에 묻은 얼룩이 실수였는지 의도적인 시험이었는지는 사례마다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이런 물질적 증거를 본다면 최소한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서가에 꽂혀 있던 장식품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실제로 펼치고, 읽고, 시험하고, 메모하며 사용했다.

그렇다면 손때를 깨끗하게 지우면 안 될까?
여기에서 보존과 복원이 다시 어려워진다.
손때는 종이 열화를 촉진하는 오염일 수도 있다.
표면 먼지를 줄이는 것이 보존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모든 얼룩을 무조건 없애버리면 그 책의 사용 이력까지 함께 사라질 수 있다.
14번째 글에서 오래된 얼룩을 전부 지우는 것이 반드시 좋은 복원은 아니라고 했던 이유와 연결된다.
어떤 얼룩은 단순한 오염이다.
어떤 얼룩은 사고의 흔적이다.
그리고 어떤 흔적은 과거 사용자의 행동을 보여주는 자료다.
보존처리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이 흔적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하는 이유다.
가장 깨끗한 페이지가 가장 중요한 페이지는 아닐 수도 있다
책을 새것처럼 생각하면 깨끗한 것이 좋은 상태처럼 보인다.
하지만 역사자료에서는 관점이 달라진다.
유난히 닳은 페이지가 오히려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어떤 기도문 앞에서는 손가락 흔적이 짙게 쌓였다.
어떤 그림은 사람들이 반복해서 만져 안료가 닳았다.
어떤 페이지는 모서리가 접혔다.
다른 책에는 여백에 안료를 시험한 자국까지 남았다.
본문에는 적혀 있지 않은 정보다.
저자가 쓴 것도 아니다.
그 책을 읽은 사람들이 세월을 두고 한 줄씩 덧붙인 기록에 가깝다.
책은 글만 저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책 안에 무엇이 남아 있느냐고 물으면 글과 그림을 떠올린다.
하지만 오래된 책에는 또 하나가 저장돼 있다.
행동이다.
어디를 잡았는지, 어떤 페이지를 자주 펼쳤는지, 무엇에 밑줄을 그었는지, 어느 그림을 만졌는지, 어떤 곳을 다시 찾으려고 접어두었는지가 재료에 남는다.
물론 손때 하나만 보고 정확한 독자의 생각까지 알아낼 수는 없다.
“이 사람이 이 문장을 가장 좋아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수많은 흔적이 같은 방향을 가리킬 때 과거 독자의 행동에 조금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그것이 오래된 책이 재미있는 이유다.
책은 출판된 날에 완성되는 물건이 아니다.
사람이 읽을 때마다 조금씩 변한다.
그리고 수백 년 뒤에는 그 변화 자체가 연구자료가 된다.
책의 글은 저자가 남기지만, 책의 마모는 독자가 남긴다.
어쩌면 오래된 책에서 가장 많이 읽힌 부분은 목차가 아니라 손때가 먼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REFERENCES
University of St Andrews
Dirty Books: Quantifying Patterns of Use in Medieval Manuscripts Using a Densitometer
Journal of Historians of Netherlandish Art
Dirty Books: Quantifying Patterns of Use in Medieval Manuscripts Using a Densitometer
Library of Congress
The Artist as Reader? Looking at Dirty Books
Theodor Fontane Archive / UCLAB
Reading Tr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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