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의 글씨가 자외선 아래에서 갑자기 선명해지는 이유
검게 그을린 종이 조각 하나가 있다.
눈으로 보면 글씨인지 얼룩인지조차 구별하기 어렵다.
수백 년 전 불에 타 종이는 갈색과 검은색으로 변했고, 원래 적혀 있던 글자는 그 아래에 묻혀버렸다.
그런데 같은 종이를 다른 빛 아래에서 촬영하자 갑자기 글자가 나타난다.
없던 글씨가 새로 생긴 것은 아니다.
계속 그 자리에 있었지만 우리 눈으로 구별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런 장면은 영화 속 특수효과가 아니다.
오늘날 도서관과 보존연구실에서는 자외선과 적외선을 포함한 여러 파장의 빛을 이용해 오래된 책과 문서에 숨어 있는 정보를 실제로 조사한다.

사람의 눈이 보는 빛은 생각보다 좁다
우리는 종이에 검은 글씨가 있으면 검게 보이고, 갈색 얼룩이 있으면 갈색으로 본다.
하지만 이것은 물질이 가진 모든 특징을 보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눈은 전자기파 가운데 비교적 좁은 가시광선 영역만 볼 수 있다.
그 바깥에는 자외선과 적외선이 있다.
그리고 종이, 잉크, 접착제, 안료 같은 물질은 서로 다른 파장의 빛을 받았을 때 똑같이 반응하지 않는다.
어떤 재료는 특정 파장의 빛을 많이 흡수한다.
어떤 것은 반사한다.
어떤 재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외선 에너지를 흡수한 뒤, 그것을 다시 눈에 보이는 빛으로 내보내기도 한다.
이를 **형광(fluorescence)**이라고 한다.
보존조사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UV-induced visible fluorescence, 즉 자외선을 비췄을 때 발생하는 가시광선 형광을 촬영하는 방식이다.
쉽게 말하면 자외선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외선을 받은 재료가 어떻게 다르게 반응하는지를 보는 것이다.
같은 색의 잉크도 자외선에서는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비슷한 검은색 잉크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재료의 조성이 다르면 특정 파장에 대한 반응도 달라질 수 있다.
한 잉크는 어둡게 남고, 다른 잉크는 주변 종이와 대비가 달라질 수 있다.
종이 표면의 접착제나 보수재가 밝게 형광을 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육안으로는 한 번에 쓰인 것처럼 보이는 문서에서도 서로 다른 재료가 사용됐을 가능성을 조사할 수 있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주의점이 있다.
자외선에서 다르게 보인다고 해서 곧바로 ‘다른 사람이 쓴 글씨’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재료가 다를 수도 있고, 노화 정도가 다를 수도 있으며, 표면의 오염이나 과거 보존처리가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자외선 촬영은 답을 자동으로 알려주는 기계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던 차이를 먼저 찾아주는 조사도구에 가깝다.
글씨보다 먼저 ‘수리 흔적’이 나타나기도 한다
자외선 조사의 재미있는 점은 숨은 글씨만 찾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Library of Congress가 보존처리한 알브레히트 뒤러의 유명한 판화 《코뿔소》를 보면 이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일반 조명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종이의 열화 부위가 자외선 유도 형광 촬영에서는 밝은 노란색으로 나타났다.
뒷면에 남아 있던 오래된 힌지의 접착제 흔적도 형광을 통해 더 분명하게 확인됐다.
보존처리가 진행된 뒤 다시 촬영하자 일부 형광이 감소한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특수촬영은 단순히 “숨은 그림을 찾아내는 기술”이 아니다.
어디에 접착제가 남아 있는지, 어떤 얼룩이 존재하는지, 처리 전후에 재료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기록하는 데도 사용된다.

300년 전 불에 탄 책에서도 글씨가 다시 나타났다
최근에는 훨씬 극적인 사례도 있다.
영국도서관이 소장한 Cotton Genesis다.
이 필사본은 약 5세기에 만들어진 그리스어 《창세기》로, 현존하는 초기 채색 성서 가운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그런데 1731년 10월 29일 런던의 Ashburnham House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그곳에는 유명한 Cotton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Cotton Genesis 역시 불길을 피하지 못했다.
한때 166장의 folio와 수많은 삽화를 가진 필사본이었지만, 화재 이후에는 심하게 탄 129개의 조각 형태로 남았다.
종이는 검게 그을렸고, 본문과 그림 상당 부분은 사람의 눈으로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됐다.
그 상태가 수백 년 동안 이어졌다.
그러다 2026년 British Library가 이 자료에 새로운 **다중분광촬영(multispectral imaging)**을 적용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육안에서는 거의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그리스어 글씨가 자외선 이미지에서 훨씬 분명하게 나타났다.
심지어 본문만 나온 것도 아니었다.
중세와 근세 사람들이 나중에 추가한 라틴어 메모도 새롭게 확인됐다.
불에 타서 읽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종이 조각 속에 글씨는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이다.
왜 검게 탄 종이에서 글씨가 다시 보였을까?
자외선이 잉크를 복원한 것은 아니다.
이미지는 재료 사이의 광학적 차이를 이용한 결과다.
화재로 변색된 종이와 그 위에 남아 있는 잉크는 서로 다른 물질이다.
가시광선에서는 둘 다 어둡게 보여 대비가 거의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자외선이나 적외선 영역에서는 두 재료가 빛을 흡수하고 반사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다.
그러면 카메라는 사람 눈이 구분하지 못한 차이를 기록할 수 있다.
즉, 글씨가 사라졌다가 돌아온 것이 아니다.
배경과 글씨를 구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은 것이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자외선 하나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빛을 비교한다
실제 보존과학에서는 자외선 하나만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같은 페이지를 가시광선, 자외선, 적외선 등 여러 파장으로 촬영한다.
이것이 다중분광촬영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특정 파장에서는 얼룩이 강하게 보이고, 다른 파장에서는 얼룩이 약해지면서 글씨가 나타날 수 있다.
한 잉크는 적외선에서 거의 사라지지만 다른 잉크는 남을 수도 있다.
여러 이미지를 디지털 방식으로 분석하면 사람의 눈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웠던 두 재료의 차이를 더 강조할 수도 있다.
미국 의회도서관에서는 이런 방법으로 지워지거나 덧칠된 글씨를 조사해왔다.
Alexander Hamilton이 1780년에 Elizabeth Schuyler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나중에 지워진 부분을 다중분광촬영해 원래 글씨와 그 위를 가린 잉크의 차이를 분리하기도 했다.
기술의 핵심은 ‘투시’가 아니다.
각 재료가 빛에 반응하는 차이를 하나씩 비교하는 것이다.

오래된 글씨가 희미하다고 자외선 손전등을 비추면 될까?
여기까지 보면 오래된 문서에 UV 램프를 직접 비춰보고 싶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권할 방법이 아니다.
자외선은 종이와 잉크의 열화를 일으킬 수 있고 사람의 눈과 피부에도 해롭다.
전문적인 보존촬영에서는 사용하는 파장과 광량, 노출시간을 관리하고 적절한 필터와 촬영장비를 사용한다.
Library of Congress도 희미해진 잉크를 자외선이나 적외선 영역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경우가 있지만, 자외선은 종이와 잉크 및 인체에 해로울 수 있기 때문에 전문가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고문헌 조사에서 중요한 것은 강한 빛을 오래 비추는 것이 아니다.
가능한 한 적은 노출로 필요한 정보를 얻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어진 것은 아니다
오래된 책에서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경우가 많다.
지워진 글씨가 남아 있을 수 있고, 불에 탄 종이 아래에도 잉크의 흔적이 존재할 수 있다.
겉으로 같은 검은 잉크처럼 보여도 재료가 서로 다를 수 있다.
오래전에 붙인 접착제가 지금은 투명해져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가시광선에서는 이런 차이가 모두 한데 섞여 보인다.
그러나 빛의 종류를 바꾸면 관계가 달라진다.
어떤 것은 사라지고, 어떤 것은 더 선명해지고, 평소에는 존재조차 몰랐던 흔적이 나타난다.
그래서 보존과학에서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때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범위를 넓혀주는 조사도구다.
1731년 화재를 견딘 작은 검은 종이 조각에서 2026년 다시 글씨를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같은 이유다.
수백 년 동안 글씨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있는 빛을 아직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래된 책의 비밀은 때로 종이 안에 숨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빛 속에 숨어 있다.
REFERENCES
British Library
Rescued from the Flames: The Cotton Genesis Restored to Life
Library of Congress
Technical Examination and Conservation of Dürer’s Rhinoceros
Library of Congress
Conservation Photodocumentation at the Library of Congress
Library of Congress
Digital Imaging Workflow for Treatment Documentation
Library of Congress
What Have We to Do with Any Thing but Love?
voucher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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