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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권만 보고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추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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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 한 권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표지에는 출판사 이름이 없다.

첫 장도 사라졌다.

누가 만들었는지 적힌 기록도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책이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을까?

의외로 책 자체에 단서가 많이 남아 있다.

종이를 빛에 비추면 워터마크가 나타난다.

책등을 보면 어떤 방식으로 제본했는지 알 수 있다.

여백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고, 표지 안쪽에는 오래된 장서표가 붙어 있다.

한 장씩 살펴보다 보면 책은 조금씩 자신의 과거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하나 있다.

종이가 만들어진 곳과 책이 만들어진 곳이 서로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오래된 희귀본 한 권을 펼쳐 종이, 책등, 표지 안쪽의 소장 흔적과 워터마크를 차례로 조사하는 모습

종이가 프랑스산이라고 프랑스 책은 아니다

책의 출신을 추적할 때 가장 흥미로운 단서 가운데 하나가 워터마크다.

특정 제지소나 지역에서 사용된 문양과 비교하면 종이가 어디에서 만들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워터마크가 프랑스 종이를 가리킨다면 이 책도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고 보면 될까?

꼭 그렇지는 않다.

종이는 상품이었다.

도시와 국경을 넘어 거래됐다.

이탈리아에서 생산한 종이를 독일계 인쇄업자가 베네치아에서 사용할 수도 있었고, 네덜란드에서 만든 종이가 다른 나라의 인쇄소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조사한 15세기 희귀본 가운데에는 로마와 베네치아에서 인쇄됐지만 Fabriano 지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확인되는 종이를 사용한 책들이 있다.

책의 제작지는 로마 또는 베네치아지만 종이의 출신은 또 다른 곳인 셈이다.

그래서 워터마크가 알려주는 것은 우선 “이 종이가 어디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은가” 이다.

그것만으로 책 전체의 제작지를 확정하지 않는다.

실제 책 한 권에서는 세 지역의 시간이 겹치기도 한다

British Library가 소장한 한 15세기 필사본은 이런 문제를 아주 잘 보여준다.

현재 이 필사본의 기원은 영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종이를 살펴보면 목걸이를 한 개 모양의 워터마크가 나타난다.

워터마크 비교를 통해 이 종이는 1471~1498년 무렵 브뤼셀 또는 프랑스 북부와 관련된 종이로 판단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륙에서 만들어진 책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필사본 자체의 기원은 영국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표지다.

현재 보이는 붉은 가죽 금박 제본은 원래 제작 당시의 것이 아니라 1600년 이후의 왕실 제본이다.

한 권 안에 서로 다른 시간이 겹쳐 있다.

종이는 유럽 대륙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고, 본문은 영국에서 만들어졌으며, 현재의 제본은 훨씬 뒤에 바뀌었다.

오래된 필사본의 종이를 투과광으로 확인하자 희미한 워터마크가 나타나고, 그 책에는 훨씬 후대에 제작된 붉은 가죽 표지가 남아 있는 모습

이 사례를 보면 질문 자체가 조금 달라진다.

“이 책은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 보다 “이 책의 어느 부분이 어디에서 만들어졌을까?”라고 묻는 편이 더 정확할 때가 있다.

책등도 지역과 시대의 단서가 된다

워터마크가 종이의 출신을 말한다면 제본은 책이 지나온 또 다른 시간을 보여준다.

책등의 sewing support는 어떤 재료인지, 종이 묶음을 어떤 방식으로 꿰맸는지, 표지판은 나무인지 판지인지, 가죽은 어떤 방식으로 씌웠는지, 책등에 raised band가 있는지 등을 살핀다.

제본기술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했다.

그래서 특정 구조가 발견되면 제작시기와 제본 전통을 좁히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같은 함정이 있다.

지금의 표지가 최초의 표지라는 보장은 없다.

책은 수백 년 동안 여러 번 수리되고 다시 제본되기도 했다.

15세기 본문에 18세기 표지가 붙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표지만 보고 “이 책은 18세기에 만들어졌다”고 판단하면 본문보다 수백 년 늦은 날짜를 책 전체의 나이로 착각하게 된다.

오래된 책에서는 본문과 제본의 시간을 따로 읽어야 한다.

활자도 일종의 지문이 된다

인쇄본이라면 종이 외에도 또 하나의 강력한 단서가 있다.

활자다.

초기 금속활자 인쇄에서는 인쇄소마다 사용하는 활자의 형태와 크기가 조금씩 달랐다.

특정 글자의 모양, 약자의 형태, 대문자와 소문자의 비율, 행간과 조판 습관 등을 다른 책과 비교할 수 있다.

출판지나 인쇄자 이름이 사라진 책이라도 이미 출처가 알려진 다른 인쇄본과 활자 특징이 일치하면 범위를 좁히는 데 도움이 된다.

인쇄자의 장식문양이나 printer’s mark가 남아 있다면 더 직접적인 단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하나만 보고 결론내리지는 않는다.

인쇄장비와 활자가 다른 인쇄소로 넘어갈 수도 있고, 한 인쇄자가 도시를 옮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또다시 여러 증거를 함께 봐야 한다.

앞표지 안쪽에 붙은 작은 종이가 더 많은 말을 할 수도 있다

고서를 펼치면 표지 안쪽에 작은 종이가 붙어 있는 경우가 있다.

문장이나 그림, 문장(紋章), 이름이 인쇄돼 있을 때도 있다.

이것이 **장서표(bookplate)**일 수 있다.

책에 찍힌 도장, 손으로 적은 이름, 도서관 표식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런 것을 ownership mark, 즉 소유권 표시라고 한다.

Library of Congress는 역사적인 장서표를 책의 provenance, 즉 소장 이력을 파악하는 중요한 정보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책 앞쪽에 A라는 사람의 서명, 그 위에 B 가문의 장서표, 다른 페이지에는 오래된 도서관 도장

이 차례로 남아 있다면 책이 여러 소유자를 거쳤다는 사실을 추적할 수 있다.

오래된 책의 앞표지 안쪽에 겹쳐 붙은 역사적 장서표와 희미한 소유자 도장, 손글씨 이름을 보존연구자가 확대경으로 조사하는 모습

흥미로운 것은 이런 표시가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책은 소장인과 장서표가 없었다면 지금의 소장 경로를 설명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실제로 Library of Congress는 일부 희귀본이 과거 Smithsonian Institution 소장품이었다는 사실을 책 자체에 남은 잉크 도장과 장서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책 표면에 남은 작은 도장이 이동경로의 증거가 된 것이다.

여백의 낙서도 지우기 전에 읽어야 한다

소유자의 이름이 반드시 장서표처럼 정돈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

첫 장 구석에 이름을 써놓았을 수도 있다.

가격을 적었을 수도 있고, 구입한 도시와 날짜를 남겼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여백에 메모를 했고, 다른 사람은 그 아래에 또 다른 글씨를 남겼을 수도 있다.

이런 흔적이 여러 시대에 걸쳐 쌓이면 책의 이동경로를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오래된 책의 필기를 단순히 ‘지저분한 낙서’라고 보고 지워버리는 것은 위험하다.

그 작은 이름 하나가 이전 소유자를 찾는 유일한 단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과 책의 역사를 보존하는 것이 항상 같은 방향은 아니다.

수리 흔적도 책이 이동했다는 증거가 된다

찢어진 페이지에 붙인 종이를 보자.

본문 종이와 색과 질감이 다르다.

빛에 비추면 다른 워터마크까지 나타난다.

그렇다면 원래 제작할 때 붙인 종이가 아니라 후대에 보수한 것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책등도 마찬가지다.

원래 실 구조 위에 다른 시대의 실이 덧붙어 있거나,

새 표지가 이전의 흔적을 덮고 있을 수 있다.

이런 수리는 책의 ‘원형을 훼손한 것’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언제 어디서 수리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면 책이 그 시기에도 실제로 사용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리도 책의 생애에 포함된다.

단서를 하나씩 놓으면 책의 이동경로가 나타난다

한 권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발견됐다고 해보자.

종이의 워터마크는 이탈리아의 특정 지역과 비슷하다.

활자와 조판은 베네치아 인쇄본과 일치한다.

첫 장에는 17세기 프랑스인의 이름이 있다.

표지는 18세기 영국식 제본 특징을 보인다.

19세기 도서관 장서표도 붙어 있다.

각각 따로 보면 작은 정보다.

하지만 시간순으로 놓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종이가 만들어지고, 인쇄되고, 다른 나라로 이동하고, 새 주인을 만나고, 다시 제본되고, 마지막에는 도서관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이동을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수십 년의 공백이 남을 수도 있고, 장서표가 떨어져 나갔을 수도 있으며, 워터마크가 너무 일부만 남아 비교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래서 provenance 연구는 탐정소설처럼 하나의 단서에서 정답을 뽑아내는 일이 아니다.

서로 독립된 여러 증거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지 확인하는 작업에 가깝다.

책 한 권은 한 장소에서 태어난 물건이 아닐 수도 있다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책 한 권만 보고 어디서 만들어졌는지 추적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하지만 조사할수록 ‘어디서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이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종이는 한 도시에서 만들어졌다.

다른 도시에서 인쇄됐다.

또 다른 곳에서 제본됐다.

수백 년 뒤에는 새로운 표지를 얻었다.

주인이 바뀔 때마다 이름과 도장이 하나씩 더해졌다.

책은 한 번 만들어지고 끝나는 물건이 아니라 계속 이동하면서 변하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오래된 책의 출신을 찾는다는 것은 출생지 하나를 알아내는 일이 아니다.

종이의 출신, 본문의 제작지, 제본된 장소, 소유자가 바뀐 과정, 수리된 시간을 하나씩 구분해 보는 일이다.

워터마크는 종이의 이야기를 한다.

활자는 인쇄소를 암시한다.

제본은 다른 시대를 보여준다.

장서표와 도장은 사람과 장소를 연결한다.

그리고 이 작은 증거들이 모이면 책 한 권이 지나온 길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된 책은 여행일기를 쓰지 않는다. 대신 자기 몸에 여행의 흔적을 남긴다.

REFERENCES

Library of Congress
The Secret (Past) Lives of Library Books

Library of Congress
Fabriano Paper in Library of Congress Collections

Library of Congress
Ownership Marking of Collection Materials

Library of Congress
Binding Two National Libraries: Rare Books from the Smithsonian

British Library
Royal MS 18 B II — Archives and Manuscripts Cata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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