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타고 물에 젖은 책은 어떻게 다시 살아남았을까?
2004년 9월 2일 밤.
독일 바이마르에 있는 헤르초긴 안나 아말리아 도서관에서 불이 났다.
당시 역사적 도서관 건물 안에는 약 19만 6천 권의 책이 있었다.
사람들은 불길이 번지는 건물 안에서 책을 밖으로 옮겼다. 약 2만 8천 권은 온전하게 구조됐지만, 5만 권은 불에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책들 가운데 상당수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불에 그을리고,
소방용수에 흠뻑 젖고,
책등과 표지가 뒤틀리고,
어떤 책은 가장자리가 까맣게 타서 손으로 건드리기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그렇게 손상된 책이 약 11만 8천 권이었다.

사진으로 남은 책들을 보면 처음에는 이런 생각이 든다.
이 정도면 버려야 하는 것 아닐까?
하지만 도서관은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 화재는 이후 20년 넘게 이어지는 거대한 복원 프로젝트의 시작이 됐다.
불보다 물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도서관 화재라고 하면 가장 먼저 불에 탄 책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불을 끄는 과정에서 사용한 물 역시 큰 문제였다.
불길에서 살아남은 책 가운데 상당수가 소방용수에 젖었다.
종이는 물을 빨아들이며 팽창한다.
책 한 권에는 종이만 있는 것도 아니다.
가죽, 천, 실, 접착제, 양피지처럼 물에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재료들이 함께 묶여 있다.
젖었다가 마르는 동안 책이 뒤틀리고 종이가 달라붙거나 곰팡이가 발생할 위험도 커진다.
그렇다고 수만 권을 한꺼번에 펼쳐 말릴 수도 없다.
시간을 끌수록 상태는 더 나빠질 수 있었다.
그래서 구조된 젖은 책과 파편 가운데 일부는 **동결한 뒤 동결건조(Freeze-drying)**하는 방법으로 처리됐다.
쉽게 말하면 젖은 책의 상태를 먼저 얼려 멈춰 세운 뒤, 얼어 있는 수분을 제거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이 흥미로운 이유는 복원이 항상 ‘고치는 것’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재난 직후에는 책을 아름답게 복원하는 것보다
손상이 더 진행되는 시간을 멈추는 일이 먼저였다.
잿더미에서 나온 책에는 이름이 생겼다
가장 심하게 손상된 자료들은 조금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아셰뷔허(Aschebücher).
우리말로 옮기면 ‘재의 책’ 또는 ‘재가 된 책들’ 정도다.
화재 잔해 속에서 수습된 약 2만 5천 건의 책 파편이었다.
표지는 이미 사라진 경우가 많았다.
바깥쪽 종이는 숯처럼 검게 변하거나 재가 되었고, 페이지 가장자리도 타서 없어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있었다.
겉은 심하게 타버렸는데 책의 안쪽까지 살펴보면 글자가 남아 있는 부분이 상당수 존재했다.

책으로서의 형태는 거의 잃었어도 정보는 살아 있었다.
여기에서 복원의 목표도 분명해졌다.
불타기 전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되돌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대신 남아 있는 부분을 더 이상 잃지 않도록 안정시키고, 다시 읽고 연구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 목표가 됐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이 정도로 심하게 탄 책을 수만 권 규모로 복원해본 방법이 당시에는 없었다.
한 장씩 다루기에는 너무 많았다
한 명의 복원가가 책 한 권을 몇 달 동안 정성스럽게 다루는 모습을 흔히 떠올린다.
바이마르에서는 그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손상된 양이 너무 많았다.
‘재의 책’만 수백만 장의 종이에 해당했다.
그래서 도서관은 2008년 화재 피해 기록물을 전문적으로 처리하는 복원 작업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 권씩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처리하는 대신, 심하게 손상된 종이를 일정한 품질로 반복해서 처리할 수 있는 대량 복원 공정을 개발했다.
여기서 보존은 거의 연구와 공정설계에 가까워진다.
불에 탄 종이를 다시 물에 넣는다
복원 과정을 살펴보다 보면 꽤 의외의 장면이 나온다.
화재 당시 물 때문에 손상된 종이를 다시 물속에 넣는다.
처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사고 당시의 침수와 같은 일이 아니다.
상태가 검토된 종이를 통제된 조건에서 처리하는 전문적인 습식 공정이다.
먼저 복원 전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그다음 분리된 종이들을 특별히 고안된 압축 카세트(Compression cassette) 안에 넣는다.
카세트가 종이를 지지한 상태에서 물속으로 들어간다.

이 과정에서 종이에 붙어 있던 재와 오염물질, 일부 수용성 열화산물이 제거된다.
중요한 것은 종이를 물에 넣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종이가 움직이고 부서지지 않도록 어떻게 지지하고, 어떤 순서와 조건으로 처리하느냐에 있다.
그래서 이런 사례를 보고 오래된 책을 집에서 물로 씻어도 된다고 받아들이면 안 된다.
같은 ‘물’이어도 사고로 젖는 것과 전문적인 습식 보존처리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타서 사라진 가장자리는 어떻게 할까?
세척을 끝냈다고 책이 다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종이 가장자리 상당 부분이 이미 불에 타서 없어졌다.
그대로 두면 남은 부분 역시 너무 약해 다루기 어렵다.
여기에서 종이 섬유를 다시 채워 넣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손실된 부분에 셀룰로오스 기반의 새로운 종이섬유를 넣어 형태를 보완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필요한 경우 매우 얇은 일본 종이를 이용해 양쪽 면을 안정화한다.
이전 글에서 살펴본 얇은 보수용 종이가 실제 대규모 복원 현장에서도 등장하는 셈이다.
중요한 점은 타버린 부분에 원래 있던 글자를 상상해서 다시 그려 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잃어버린 정보는 잃어버린 상태로 남긴다.
복원하는 것은 글의 내용이 아니라 그 글이 남아 있는 물리적인 종이다.
복원했는데도 불탄 흔적은 남아 있다
복원이 끝난 ‘재의 책’을 보면 새 책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을린 흔적이 남아 있고,
어디까지가 원래 종이이고 어디부터가 보강된 부분인지 확인할 수 있는 책도 있다.
이 점이 오히려 인상적이다.
복원의 목적이 화재가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데 있었다면 검게 탄 흔적부터 모두 감추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흔적 자체가 이제 책이 지나온 역사의 일부가 됐다.
화재 이전에 만들어진 책이면서 동시에 2004년의 재난을 통과한 물건이 된 것이다.
그래서 복원을 마친 종이들은 다시 모아 책의 형태를 만들고, 필요에 따라 보존용 제본과 상자를 이용해 보호한다.
책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대신 다시 보관할 수 있고, 연구할 수 있고, 필요한 경우 이용할 수 있는 상태를 얻었다.
복원이 항상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아니다
이 사례를 따라가다 보면 처음 생각했던 ‘복원’의 모습과 꽤 멀어진다.
불에 탄 부분은 다시 생기지 않았다.
사라진 글자도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의 표지가 되살아난 것도 아니다.
심지어 바이마르 도서관이 공개한 복원 연구에서는 습식처리와 종이섬유 보강 과정이 원래 종이의 조성과 표면에 변화를 준다는 점도 숨기지 않는다.
그 변화를 감수하면서도 심하게 취약해진 종이를 안정시키고 남아 있는 내용을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 보존이라는 일이 꽤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완벽한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손상 앞에서 무엇을 잃지 않기 위해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2004년의 화재는 수많은 책을 없앴다.
하지만 살아남은 책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기술도 만들어냈다.
당시에는 대량의 화재 피해 도서를 처리할 방법이 없었지만, 이후 바이마르에는 화재 손상 기록물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업장이 생겼고 그곳에서 개발된 방법은 지금도 계속 연구되고 있다.
‘재의 책’이라는 이름도 그래서 조금 다르게 들린다.
재가 되어 끝난 책이라는 뜻보다,
재 속에서도 남아 있던 것을 다시 찾아낸 책에 가깝다.
REFERENCES
Klassik Stiftung Weimar
After the Fire
Klassik Stiftung Weimar
Aschebücher
Herzogin Anna Amalia Bibliothek
Lehrwerkstatt
Klassik Stiftung Weimar
Restaurierung historischer Drucke
Klassik Stiftung Weimar
Restaurieren nach dem Brand
voucherm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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